5화
‹ ›그로부터 며칠 뒤, 성문 앞이 갑작스러운 소란으로 뒤덮였다. 평소라면 상단의 짐마차나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발소리만이 오갔을 그 자리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마차 한 대가 예고 없이 나타나 성문을 통과했다. 마차를 끄는 말들은 값비싼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마차 몸체에는 금박으로 새긴 가문의 문장이 번쩍거려서, 지나가던 병사들이 저마다 눈을 크게 뜨고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마차 문이 열리고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이건우 자작이었다. 그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 성큼성큼 안뜰로 걸어 들어오며, 마주치는 병사들에게 오만한 눈빛을 던졌다. 마치 이곳이 자신의 영지라도 되는 양,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는 거리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 딸은 어디 있는가!"
그의 목소리가 성벽에 부딪혀 울렸는데, 마침 서재에서 나오던 이서연이 그 소리를 듣고 굳어버린 채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미끄러질 뻔한 것을 겨우 붙잡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그녀는 느꼈다. 저 목소리를 잊을 리가 없었다. 저 목소리는 언제나 그녀를 얼어붙게 만들었으니까.
"아버지…… 어떻게 여기까지……."
이서연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가자, 이건우는 딸을 훑어보며 대뜸 말했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 위아래로 시선을 훑는 그 눈빛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옷깃을 살짝 여몄다.
"변경백령 살림살이가 궁금해서 왔지. 겸사겸사 저번에 넘긴 골동품 목록도 확인해야 하고."
그는 딸의 안부보다는 뒤따라 나오는 선우진을 향해 더 살가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딸에게 던졌던 차가운 눈빛과는 전혀 다른, 기름기가 흐르는 미소였다.
"각하,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 서연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워낙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아이라 걱정이 많습니다."
이서연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핏기가 가시는 것을 유하은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차마 자리를 피하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의 대화를 숨죽여 듣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깎아내리는 것은 이서연에게 익숙한 일인 듯했지만, 그 익숙함이 상처를 덜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유하은은 이서연의 굳은 어깨선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이서연이 무언가 반박하려 했지만, 이건우는 딸의 말을 자르며 선우진에게 계속 말을 이어갔다. 아예 딸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그의 시선은 오직 선우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 결혼이 우리 가문 빚을 청산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사실 이 아이 하나로 이 정도 조건을 받아낸 것도 제가 협상을 잘한 덕이지요.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이런 혼사가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발이 넓어서 겨우겨우……"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서연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받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은 그저 협상 카드였을 뿐이었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에게 자신은 딸이라기보다 처분 가능한 자산이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늘 그래왔다. 명절이면 친척들 앞에서 이서연의 흠을 늘어놓으며 혼처를 걱정하던 아버지, 손님이 올 때마다 딸의 재주보다는 결혼 조건을 먼저 앞세우던 아버지. 그런데 이렇게 낯선 사람 앞에서, 그것도 남편이 될 사람 앞에서 다시 확인받는 기분은 유독 견디기 어려웠다.
이서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 했지만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목구멍 안쪽이 뜨겁게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는 몇 번이고 숨을 삼키며 그 열기를 억지로 눌러 담았다. 울면 안 된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아버지에게 또 하나의 약점을 던져주는 꼴이 될 뿐이었다.
선우진은 그 순간, 이건우의 말을 듣는 내내 미간을 좁힌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진청색 눈동자에는 평소와는 다른 서늘한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안개 낀 호수처럼 깊고 조용하던 그 눈이 지금은 얼어붙은 유리처럼 딱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이서연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태연한 척하려다 실패하고 있는 그 미세한 균열을 정확히 읽어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으면서도 손끝이 떨리는 것,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며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는 것.
"자작." 선우진이 낮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온도가 없었다. "영애는 협상 카드가 아니라 이제 이 가문의 안주인이오. 그런 언사는……"
"각하, 무슨 말씀을. 저는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이건우가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아이가 워낙 제멋대로여서, 각하께서도 고생이 많으실 겁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지요. 제 말은 안 듣고……"
"그만하시오." 선우진의 표정은 점점 더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명확했다. "여기서 더 말씀을 이으신다면, 내가 자작을 이 성에 계속 머물게 할 이유가 없어질 것 같소만."
순간 안뜰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유하은은 느꼈다. 이건우의 얼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는 애써 웃음으로 그것을 덮으려 했다.
이서연은 그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 조용히 몸을 돌려 안뜰을 벗어났는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선우진의 눈빛에 미처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걷는 뒷모습마저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뻣뻣했고, 그 뻣뻣함이 오히려 그녀의 상처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성 안에는 이건우 자작이 며칠 더 머물겠다는 통보가 퍼졌으며, 그 소식을 들은 이서연의 방문은 굳게 닫힌 채 밤이 깊도록 열리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던 시녀들도, 저녁 식사를 알리러 온 하인도 그 문 앞에서 조용히 발걸음을 돌릴 뿐이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달빛만이 그 닫힌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고, 성 전체가 그 침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