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서연이 변경백령에 도착한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서고 한쪽 구석에서 낡은 지도 뭉치를 발견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나무 상자 안에 돌돌 말려 들어 있던 그것을 처음 펼쳤을 때,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는데, 양피지 특유의 누런 빛깔과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순간부터 이미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던 탓이었다. 지도의 가장자리에는 알아보기 힘든 옛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녀가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확인한 바로는 백 년 전 설한 지역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요새 도시였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자료였다. 성벽의 배치도 다르고, 지금은 사라진 수로의 흔적까지 그려져 있어서, 이서연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보물이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걸 발견하다니, 역사학자로서 이보다 더 짜릿한 순간이 있을까.' 그녀는 지도를 품에 안다시피 하고 다음 자료를 찾으려 책장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발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책장 깊숙이 손을 넣어 뒤지다가 균형을 잃은 두꺼운 병서 더미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그녀의 발 앞으로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고, 이서연은 콜록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아, 이거 참……." 이서연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한숨을 내쉬며 무너진 책 더미를 망연히 내려다보는데, 마침 서고 문이 드르륵 열리며 선우진이 들어섰다. 그는 훈련장에서 막 돌아온 듯 여전히 검을 허리에 찬 채였고, 겨울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서늘한 기운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진 책들을 보며 그가 짧게 미간을 좁혔다.
"여긴 정리된 서고요. 그렇게 함부로 뒤지면……"
"저, 정리라고 하기엔 좀…… 순서가 이상하던데요." 이서연이 먼지를 털어내며 대꾸했다. 손등으로 코끝을 문지르며 그녀는 애써 당당한 척 말을 이었다. "연도별도 아니고, 주제별도 아니고, 그냥 아무렇게나 쌓여 있잖아요. 이건 병서인데 저기 저건 시집이고, 그 옆엔 또 회계 문서던데요."
"내가 정리한 게 아니오. 선대 당주의 방식이었소." 선우진이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바닥에 떨어진 책 하나를 집어 올렸는데, 그 순간 이서연도 같은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두 사람의 손끝이 살짝 스쳤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확 거두었고, 선우진 역시 눈에 띄게 굳은 채로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정적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는데, 이서연은 그 짧은 순간 선우진의 손이 검을 쥐던 손답게 거칠고 단단해 보였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며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걸 왜 신경 쓰는 거야.'
"……가지시오." 선우진이 먼저 정신을 차린 듯 책을 그녀에게 건넸다.
"고, 고맙습니다." 이서연이 어색하게 책을 받아 들며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을 애써 지도 탓으로 돌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 훈련 방식은 좀 독특하더라고요. 아까 창밖으로 보니까 병사들이 눈밭에서 신발도 안 신고 훈련하던데…… 얼어 죽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어요."
"설한의 방식이오. 발바닥이 눈의 감촉을 익혀야 전장에서 실수하지 않소." 선우진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건 남부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훈련법인데요. 혹시 이것도 기록으로 남아 있나요? 언제부터 시작된 관습인지, 처음엔 왜 그런 방식을 택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마치 눈앞에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이서연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선우진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녀의 눈이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이렇게까지 밝게 빛나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을 향한 관심이 아니라 순전히 역사적 호기심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 여자는 사람의 손끝이 스쳤을 때보다 오래된 훈련법 이야기에 더 신이 나는군.'
"……기록은 없소. 구전으로 전해질 뿐이오." 그가 겨우 대답했다.
"그럼 제가 정리해도 될까요? 구술 채록이라는 방식이 있는데, 나이 드신 기사분들께 여쭤보면서 하나씩 받아 적으면……" 이서연이 벌써부터 머릿속으로 질문 목록을 짜기 시작한 듯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언제 시작됐는지, 누가 처음 그렇게 했는지, 혹시 그 이전에는 다른 방식이 있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당신, 정말로 그런 것에 흥이 나오?" 선우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의아함이 묻어 있었는데, 평생 검과 훈련과 전략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그에게는 옛 문서와 구전 이야기 따위에 이토록 열을 올리는 사람이 신기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이서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이상하게 보이실지 모르지만, 저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알아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어요. 눈밭에서 맨발로 훈련하는 이유 하나에도 분명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선택이 담겨 있을 거잖아요. 그런 걸 하나씩 캐내는 게…… 저한테는 보물찾기 같은 거예요."
선우진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표정이, 지도 뭉치를 발견했을 때 지었을 법한 그 표정 그대로라는 것을 알아챘을 뿐이었다. 그는 서고를 나서기 전 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원한다면 기사들에게 말해두겠소. 다치지 않게 조심은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서고를 나갔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서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뺨이 계속 뜨거운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눈밭 훈련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손끝이 스쳤던 그 짧은 순간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손에 쥔 낡은 병서의 무게보다, 방금 전 그 짧은 접촉의 감각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조금 당황스럽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