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마차가 마지막 고개를 넘어서자, 이서연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잿빛 하늘 아래 눈 덮인 성벽이 마치 오래된 석판화 속 풍경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 낮게 깔린 구름이 성탑의 끝을 가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설한. 이름 그대로 눈이 마르지 않는 땅이라던가……. 왕도에서만 살아온 이서연으로서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이름이었는데, 실제로 마주하고 보니 그 이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었다. 마차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마저 벌써부터 살을 베어내듯 차가웠으니까.
이서연은 무릎 위에 올려둔 상자를 다시 한번 손끝으로 매만졌다. 상자 안에는 그녀가 결혼의 유일한 조건으로 내걸었던 역사서 열두 권이 들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조건을 듣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거면 되겠느냐?" 하고 몇 번이나 되묻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결국 승낙했지만, 그 표정에는 딸이 무언가 더 큰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와, 동시에 딸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곤혹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어차피 딸이 무엇을 요구하든, 빚을 갚고 가문의 위신을 세우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서연으로서도 그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낯선 남자와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적어도 책은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가씨, 표정이 또 그러시네요." 맞은편에 앉은 유하은이 자수정빛 눈을 슬쩍 굴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유하은의 머리카락은 검은 색으로, 마차의 흔들림에 맞춰 잔물결처럼 살랑거리고 있었다. "긴장되세요, 아니면 벌써 책 생각 하시는 거예요?" "둘 다야." 이서연은 솔직하게 대답하며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결혼이라는 사건 자체보다, 이 낯선 변경백령에 자신의 서재를 어떻게 꾸릴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었다. 책장은 몇 개나 필요할까, 습기는 괜찮을까, 이 추운 땅에서 종이가 얼마나 잘 버텨줄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걱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유하은은 그런 주인의 속내를 훤히 안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대신 무릎 위의 담요를 한 번 더 여며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혼식장에서 책 얘기는 하지 마세요, 아가씨." 이서연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지만, 아니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마차가 성문에 가까워졌을 무렵, 갑자기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처음에는 그저 순찰대의 귀환인가 싶었으나, 그 소리의 규모와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이서연은 놀라 창문에 바짝 붙었는데, 성벽 위에서 병사들이 다급하게 뛰어다니며 무언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경 순찰대가 돌아왔다!" "의원을 불러라!" "각하께서 오신다, 문을 열어라!"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성벽 전체가 소란스러운 종소리처럼 울렸다.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서기도 전에, 성문이 활짝 열리며 피투성이가 된 기병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말들의 콧김이 하얗게 얼어붙은 공기 속으로 피어올랐고, 갑옷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검을 든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갑옷 어깨 부분이 찢어져 있었고, 뺨에는 채 마르지 않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의 진청색 눈동자는 안개 낀 겨울 숲처럼 차갑고 흔들림 없었다. 말 위에서 내려서는 동작조차 마치 오랜 세월 다듬어진 조각상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았고, 주위의 소란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 자신만은 완벽한 정적 속에 있는 듯 보였다. 이서연은 그가 누구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압도적인 광경에 압도되어 숨을 죽였고, 유하은은 마차 안에서 저도 모르게 이서연의 팔을 붙잡았다. "아, 아가씨…… 저분 좀……." 유하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남자가 말에서 내리며 성벽 위의 누군가를 향해 짧게 명령을 내리는 동안, 성문지기 하나가 허둥지둥 마차 쪽으로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자작 영애님이십니까? 각하께서 곧……" 문지기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당황함이 뒤섞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예정된 환영 절차가 이런 식으로 엉망이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은 세필로 정교하게 그린 초상화처럼 흠결 하나 없었지만, 그 표정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서연은 순간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서 일어났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이서연 자작 영애." 남자가 낮게 물었는데,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어조였다. 목소리마저 낮고 건조해서, 마치 오래 사용하지 않은 칼날 같았다.
"……네, 제가 이서연입니다." 이서연이 마차에서 내리며 대답하자, 남자는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짧게 말했다. "선우진이오. 결혼식은 예정대로 오늘 밤 치르겠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어서, 이서연은 순간 자신이 방금 인사를 나눈 상대가 정말로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서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방금까지 자신이 마차 안에서 상상했던 온갖 시나리오, 예를 들면 정중한 인사말이나 최소한의 배려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무의미해진 느낌이었다. 심지어 성문 앞에 세워진 환영 깃발조차 지금 이 상황에서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 "저기, 저 사람이……." 유하은이 조심스레 중얼거리자, 이서연은 짧게 대답했다. "내 남편이 될 사람이야." 그리고 속으로 덧붙였다. 저런 사람과 한집에서 살아야 한다니, 역사서 열두 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어쩌면 종이보다 튼튼한 방패라도 챙겨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눈 덮인 성벽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날아가며 울음소리를 흘렸는데, 그 소리가 마치 이서연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처럼 서늘하게 귓가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