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인 2역, 파혼 선언

4화

그 뒤로도 며칠 밤, 한서이는 같은 방을 드나들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사람처럼 매번 비슷한 시각, 비슷한 공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후작가의 겨울 별궁, 그것도 강윤제가 다시 이설화를 찾아온 어느 밤의 기억이었다. 방 안은 화로 하나로 겨우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창틈으로 스며드는 찬 공기가 이설화의 발치까지 기어들어와 있었고, 그녀는 그 냉기를 애써 무시한 채 창가에 앉아 눈발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소이의 눈물 사건 이후 왕실 안에는 이설화가 시녀를 괴롭혔다는 소문이 은근하게 퍼져 있었고, 그 소문은 처음엔 작은 속삭임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살이 붙어 마치 사실처럼 굳어져가는 중이었다. 그 소문을 전해 들은 강윤제가 직접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표정으로 별채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그의 걸음걸이에는 이미 어떤 판결을 내려놓은 사람의 무게가 실려 있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설화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눈에 비친 강윤제는 평소와 다름없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굳은 기색이 서려 있었다. "그대가 한 시녀를 심하게 다뤘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감정의 굴곡이 없었지만, 그 무뚝뚝함 속에 은근한 질책이 섞여 있는 것을 이설화는 놓치지 않았다. 한서이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는데, 마치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서서 심판받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이설화라면, 아니 이 순간 한서이가 예상했던 이설화의 반응이라면, 억울함을 억누른 채 냉정하게 부인하거나 아예 침묵으로 일관했을 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설화는 잠시 고개를 들어 강윤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뜻밖에도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은 슬픔도 반항도 아닌,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는데, 한서이는 그 표정을 보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믿으신다면, 저는 억울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말에 강윤제의 눈매가 처음으로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한서이의 눈에도 또렷하게 보였다. 예상했던 반박도, 냉소도 아닌, 오히려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듯한 담담한 태도가 그의 계산을 완전히 벗어난 모양이었다. 강윤제는 잠시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었는데, 이설화의 표정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그의 물음에는 이전에 없던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는데, 그것이 그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 형태의 말이라는 것을, 한서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전하께서 이미 답을 정하신 것 같아서요." 이설화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그 말끝에는 원망도 자조도 아닌, 오래전에 마모되어버린 기대의 잔재만 남아 있는 듯했다. 강윤제는 그 대답에 무어라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화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유일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었는데, 한서이는 그 정적이 마치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서이는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이설화가 굳이 반박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반박한다고 해서 믿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미 수없이 겪어 알고 있는 사람의 계산된 포기였다. 그것은 포기라기보다 차라리 방어였는데, 더 이상 다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미리 접어두는, 오래 훈련된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포기가 오히려 강윤제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린 것 같았는데, 그는 이설화의 얼굴을 몇 초간 더 오래 바라보다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다시 살피듯 눈빛을 바꾸었다. '이 여자, 생각보다 다르군.' 강윤제의 속에서 스치는 그 생각을, 이설화는 물론 알아채지 못했고, 그저 창밖의 눈발을 바라보며 이 대화가 얼른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것이 긴장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는 한서이도 구분할 수 없었다. 강윤제는 잠시 더 방 안을 둘러보듯 시선을 돌렸는데, 촛불 하나가 힘겹게 흔들리며 벽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그림자를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그가 방을 나서기 전,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낮게 말했다. "한 시녀의 말을 다시 확인해보겠소." 그 한마디는 사과도 위로도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그가 이설화의 말에 무게를 실어준 순간이었다. 이설화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감사의 표시인지 아니면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무언의 거부인지, 강윤제조차 확신할 수 없는 얼굴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혼자 남은 이설화가, 겨우 참았던 숨을 조용히 내려놓았을 때, 한서이는 그 안도가 얼마나 작고 조심스러운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곳은 다시 촬영장 밴 안이었는데, 창밖으로는 다음 촬영지의 조명 장비가 부산하게 세워지고 있었다. 밴의 좁은 좌석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잠들었던 탓인지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창문에 김이 서려 바깥 풍경이 뭉개진 유화처럼 보였다. 박준혁이 대본을 무릎에 펼쳐놓은 채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서이 씨, 다음 신 들어가야 해요. 오늘 대사 많으니까 정신 차려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볍고 사무적이었는데, 한서이는 그 익숙한 톤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아직 방금 전의 방 안 공기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한서이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조명 스태프들이 세워놓은 인공 조명이 마치 그 별궁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것 같아 잠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믿으신다면, 저는 억울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대사가 이설화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입안에서 계속 맴돌았고, 그녀는 그 문장을 삼키듯 조용히 되뇌며 대본을 펼쳤다. 손끝으로 종이를 넘기는 감촉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는데,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이 그 대본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잠깐 스쳤다. 오늘 찍을 신 역시, 그녀가 연기해야 할 악녀의 대사였다. 대본 속 냉혹한 여자의 말투와, 자신의 안에서 자꾸 되살아나는 이설화의 침묵이 겹쳐지면서, 한서이는 문득 자신이 지금 연기하는 것과 진짜로 살아온 것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밴 문이 열리고 스태프 하나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을 때, 한서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여전히 그 겨울 별궁의 냉기가 발끝에 남아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오늘 그녀가 카메라 앞에서 내뱉을 대사 한 줄 한 줄이, 어쩌면 대본이 아니라 이설화의 진짜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조용히 심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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