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조명이 다시 켜지기까지 삼십 초, 라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순간에도 한서이는 여전히 대본 속 여자, 그 냉혈한 후작 부인의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는데, 이 장면만 넘기면 오늘 촬영은 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도 몸은 이미 다음 동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발끝은 계단 아래쪽 마킹 테이프를 정확히 밟고 있었고, 시선은 렌즈보다 살짝 위, 상대 배우의 미간을 겨눈 채로 고정되어 있었다.
세트장 천장에서 인공 눈이 흩날리고, 스팀 머신이 뿜어내는 하얀 입김이 발밑으로 낮게 깔리는 가운데, 그녀는 계단 위에 선 상대 배우를 향해 손을 뻗는 시늉을 하며 대사를 씹어냈다. 눈송이 하나가 속눈썹에 걸려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지만, 그런 것쯤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대사가 먼저 튀어나왔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대사를 뱉는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것처럼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야말로 요즘 그녀를 먹여 살리는 유일한 재산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대본 위에 적힌 지시문은 '경멸, 그러나 흔들림 없이'였는데, 감독은 리허설에서 그 흔들림 없음이 좋다고 했었다. 배우 인생 십 년 동안 얻은 게 겨우 이 표정 하나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런 자조도 대사와 대사 사이의 빈틈에나 겨우 끼워 넣을 수 있는 사치였다.
계단 위 여배우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 균형을 잃는 장면에서, 원래는 스턴트맨이 대신 받쳐주기로 되어 있던 목재 세트 기둥이 예정보다 빨리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챈 건, 그녀가 손을 뻗어 상대의 옷깃을 붙잡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시야 끝에서 무언가 삐끗하는 각도로 기울어지는 게 보였는데, 그게 사람의 실수라기보단 그저 나무가 원래부터 그렇게 서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식간에 벌어졌다.
뻐걱, 하는 소리가 귀 옆에서 울리는가 싶더니 시야 한쪽이 무너지는 나무 기둥으로 가득 채워졌고, 몸이 반사적으로 옆으로 틀어졌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관자놀이 근처를 무언가 단단한 것이 스치듯 때리는 감각이 스쳤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감독의 목소리였는지 상대 배우의 것이었는지 구분할 새도 없이 세계가 기울었다.
의식이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떠오른 것은 이상하게도 고통이 아니라 냄새였는데, 밀랍 초가 타는 냄새, 마른 국화 향, 그리고 그 아래 희미하게 깔린 쇠 비린내 같은 것이 코끝을 훅 찔러왔다. 그 냄새들은 세트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길 정신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이 하얗게 밝아지며, 어딘가 낯선 방 안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대리석 바닥은 차갑게 발바닥을 파고들었고, 몸을 감싼 것은 촬영용 의상이 아니라 무겁고 겹겹인 비단이었으며, 그 옷의 허리를 조이는 끈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팽팽하게 묶여 있어 숨을 크게 들이쉬기조차 어려웠다. 손끝으로 옷자락을 더듬어보니 자수가 놓인 결이 손가락 사이로 오돌토돌하게 걸렸고, 그 촉감이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이게 뭐야.'
짧은 생각과 동시에,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낯선 이름 하나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설란 후작가의 영애, 이설화.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확신이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몸이 먼저 그 이름에 반응하며 등을 곧게 펴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손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모여 소매 안으로 숨어들었고,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무릎이 스스로 살짝 굽어지며 절을 하는 듯한 각도를 만들어냈는데, 그 모든 동작이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 이미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흘러나왔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서울 하늘에서는 본 적 없는 종류의 눈, 굵고 무겁게 떨어져 창틀에 소리 없이 쌓이는 눈이었다. 그 눈발 사이로 정원의 마른 나뭇가지들이 검은 실선처럼 그어져 있었고, 저 멀리 담장 너머로는 회색 지붕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 시대인지, 어느 나라인지도 알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낯설다는 감각보다 먼저 온 것은 이상한 익숙함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던 어떤 여자의 시선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과 겹쳐지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그 여자가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까지도 조각조각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지만, 손을 뻗어 붙잡으려는 순간 안개처럼 흩어져버렸다.
마치 두 개의 필름이 한 화면 위에 겹쳐 상영되는 것처럼, 자신이 배우 한서이라는 사실과 이설화라는 낯선 여자라는 사실이 동시에 진실로 느껴졌다. 어느 쪽이 원본이고 어느 쪽이 덧씌워진 것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고, 그 혼란 속에서 그녀는 다만 숨을 참으며 그 방의 냉기를 견디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왔어요? 서이 씨, 제 목소리 들려요?"
누군가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는 세트장 조명이 아니라 응급실 천장의 낯익은 백색 형광등이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었고, 그 깜빡임을 세다가 다시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다.
관자놀이에는 얼음주머니가 눌러져 있었고, 매니저 박준혁의 얼굴이 걱정보다는 계산이 앞선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여전히 휴대폰을 쥔 채였고, 화면에는 어딘가로 보낼 문자가 반쯤 작성된 채 떠 있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니래요. CT도 찍었는데 이상 없다고 하고. 촬영은 며칠 뒤로 미뤘고, 소속사에서 기사 관리는 다 해놨으니까 걱정 말고 좀 쉬어요."
말은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 안에는 스케줄 표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게 느껴졌고, 걱정 말라는 말이 오히려 걱정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서, 한서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다시 감았다. 눈을 감으면 다시 그 방이 나타날까 봐 두려운 마음과, 사실은 그 방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끓었는데,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방금 전 그 눈 내리는 창과 낯선 이름, 그리고 숨을 조이던 비단 끈의 감촉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손목에는 아직도 소매 안에 감춰졌던 그 자세의 잔상이 남아 있는 듯했고, 발바닥은 대리석의 냉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꿈이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손끝에는 아직도 그 허리끈을 풀어내려던 손가락의 무력한 떨림이 남아 있는 것 같았고, 그것이 단순한 상상이라고 넘기기엔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밀랍 초 냄새와 마른 국화 향까지도, 병실의 소독약 냄새 사이로 여전히 코끝에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시커멓게 깔려 있었고, 그 밤 속으로 눈은 내리지 않았다. 대신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창을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고, 그 인공적인 빛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그 다른 창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꾸 그 다른 눈, 다른 창, 다른 이름을 떠올리며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이설화라는 이름이 다시 떠올랐고, 그 이름을 따라가면 누군가의 손끝이, 혹은 발소리가 이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녀는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