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 사교계에 공식 서한을 돌렸다. 사용인들이 봉인용 인장을 찍는 소리가 서재 밖까지 들려왔던 걸 보면, 이건 그냥 편지가 아니라 일종의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그 서한의 요지는 간단했는데, 선유나와 조민혁의 약혼은 파기가 아니라 '백지화'된 것이며, 이는 양가의 합의된 결정이라는 내용이었다. '백지화라니, 아버지도 참 대단하시네.' 파기라는 단어가 주는 오점을 지우기 위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일처럼 만들어버리는 방식이었고,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이게 정말로 통할까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통했다. 이 서한이 나가고 며칠 사이 사교계의 시선이 조금씩 조민혁 쪽으로 옮겨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아버지의 영향력이라는 게 이럴 때 쓰이는구나 싶어 새삼 놀랐다. 하녀장이 슬쩍 흘려준 말로는, 벌써 몇몇 부인들 사이에서 '역시 그쪽 집안이 문제였다더라'는 식의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소문을 전해 듣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 얼굴만 떠올려도 속이 뒤틀렸는데, 지금은 그냥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으니까. '사람 마음이 이렇게 빨리 정리가 되는 건가.' 아니면 내가 그만큼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어머니 조혜란은 내 회복을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직접 죽을 끓여 오셨다. 손수 재료를 고르고 불 앞에 서서 눌러 붙지 않게 저으셨다는 걸, 나는 나중에 주방 하녀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귀부인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것 같은 그 고운 손으로 죽그릇을 들고 오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정성이 부담스러울 정도였지만 한편으로는 그 부담스러움이 오히려 편안했다. "천천히 먹어, 급할 거 없어." 어머니의 그 한마디가 어쩐지 지난 며칠간 들었던 어떤 위로보다도 크게 다가와서, 나는 숟가락을 든 채로 잠시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결국 픽 웃어버렸다.
"왜 웃어." 어머니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물으셨다.
"아니, 그냥요. 어머니가 요리하시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이게 다 네 아버지가 시켜서 그런 거지,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어머니는 그렇게 툭 쏘아붙이면서도 내 이마에 손을 대어 열을 재보셨는데, 그 손길이 말과는 정반대로 다정했다. 나는 그 온도차가 어머니 특유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웃음이 났다.
다은은 그 옆에서 매일 새로운 책을 구해다 침대맡에 쌓아놓았는데, 처음엔 그냥 심심할 나를 위한 소설책이나 시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책 제목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그중 대부분이 의학서나 약초학 관련 서적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언니, 이거 재밌을 것 같아서." 다은이 그렇게 말하며 두꺼운 약초 도감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을 때, 나는 그게 정말 재미있어서 골랐다기보다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잠깐 의심했지만, 다은의 표정에는 그런 계산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순수하게 언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골랐다는, 그 얼굴을 보고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 책들을 뒤적이던 어느 오후,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책장 위에 얇은 금빛 선을 긋고 있던 그 순간, 나는 문득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꿈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을 살리는 학문, 몸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식—어릴 적 열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궁정 약사가 만들어준 약 한 봉지가 나를 살렸던 그 순간부터, 나는 늘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품고 있었다는 걸 다시 기억해냈다. 그때 그 약사가 내 이마를 짚으며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선명했다. "열은 몸이 싸우고 있다는 증거란다. 두려워할 게 아니라 도와줘야 하는 거야." 어린 나는 그 말이 무슨 마법의 주문처럼 신비롭게 들렸었고, 그날 이후로 한동안 약사 놀이에 빠져 다은에게 잡초를 빻아 억지로 먹이려 든 적도 있었다.
'그동안 왜 잊고 살았을까.' 정략혼이라는 틀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내 미래라고 믿었던 지난 몇 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조민혁과의 약혼이 정해진 뒤로는 그 꿈이라는 단어 자체를 입 밖에 낸 적도 없었으니까. 귀족가의 영애에게 어울리는 미래란,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었고, 나는 그 각본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파혼이라는, 나에게는 재앙이었던 사건이 오히려 그 각본을 찢어버릴 명분을 준 셈이었다. '인생 참 얄궂다.'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를 찾아가 청림 학원 약학과에 진학하고 싶다는 말을 처음으로 꺼냈다. 서재 문 앞에서 손잡이를 잡고 몇 번이나 숨을 고르다가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손끝이 조금 떨렸던 것도 같다. 아버지는 서류를 검토하고 계시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내 말을 듣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그것도 잠깐이었고 곧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네가 원한다면."
그 말이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오히려 그 간결함에 더 당황했다. 반대할 거라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둔 여러 논리들—왜 약학이 나쁘지 않은 선택인지, 왜 지금이 적절한 시기인지—을 하나도 꺼내보지 못한 채, 나는 그냥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이어서 정략결혼 이야기는 당분간 미뤄두겠다고 약속하셨다. "네가 하고 싶은 걸 먼저 해봐라. 결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러시고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셨는데, 나가려던 나를 붙잡듯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대신 시험은 제대로 준비해라. 청림 학원 약학과, 그것도 S반이면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니." 그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나는 그 안에 담긴 기대를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정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실감했다. 뭔가 등이 조금 더 펴지는 느낌이었달까.
입학 시험 준비를 시작하면서 나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약초학과 해부학, 조제학 서적을 파고들었는데, 그 몰입감이 오히려 파혼 사건의 상처를 덮어주는 역할을 했다. 책상 위에 쌓인 책들이 하루하루 늘어갈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슬퍼할 시간도, 억울해할 시간도 없이 그저 다음 장,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했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산 적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난 몇 년간 나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을 뿐이었고, 스스로 원해서 뭔가에 매달려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은은 그런 나를 보며 신기해했다. "언니, 요즘 완전 딴사람 같아." 밤늦게 내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손에 든 펜을 놓지 않은 채로 대충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빠는 가끔 방에 들러 어려운 부분을 함께 봐주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오빠 특유의 무뚝뚝한 설명 방식에 나는 몇 번이나 다시 물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 성분이 저 성분과 만나면 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안 되는 거야. 외워." 그런 식의 대화가 오갈 때마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 시간들이 쌓이면서 이 가족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됐다.
몇 달 뒤, 나는 청림 학원 약학과 S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봉투를 뜯는 손이 살짝 떨렸고, 안에서 나온 종이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크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평소답지 않게 활짝 웃으셨고, 어머니는 눈물까지 훔치셨다. 다은은 내 방에 뛰어들어와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 바람에 통지서가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쁨도 잠시, 통지서 아래쪽에 첨부된 합격자 명단을 훑어봤다.
청림 학원 약학과 S반, 전체 지원자 중 단 열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