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앞으로 겨누며 몸을 돌렸는데, 손끝이 검에서 흘러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떨리고 있었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냉기가 그제야 느껴졌는데,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표면인데도 어딘가 서늘한 습기가 배어 있어서 발가락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청색 비단옷을 걸친 여인이 공중에 반투명하게 떠 있었는데, 검은 머리가 바람도 없는 공간에서 스스로 흩날리고 있었고, 발밑에는 어떤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이거 유령인가, 홀로그램인가.' 나는 검을 겨눈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다리가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여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런 잡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흠 잡을 데 없이 균형 잡혀 있어서 어디 신화 속 삽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콧대의 곡선부터 눈매의 각도까지, 인간이라면 저렇게 완벽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고, 그 순간 나는 내 얼굴이 오늘 며칠째 씻지 못한 채인 걸 새삼 떠올리며 묘하게 위축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여인은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나는 순간 검을 든 채로 얼떠름하게 서 있었는데, '주인님이라니, 이건 또 무슨 존댓말 봇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검을 든 손에 힘을 풀어야 할지, 아니면 이 모든 게 함정일지 몰라 더 세게 쥐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손아귀에서 검자루가 미끌거렸다.
"저, 저기, 넌 누군데?"
내가 어정쩡하게 묻자 여인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저는 청아라 합니다. 염제의 따님이신 정옥공주님을 모셨던 시녀였으며, 천염검에 봉인되어 삼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검을 슬쩍 내려다보았는데, 검신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붉은빛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방금까지 대화하던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삼천 년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부딪혔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아니 내가 살던 나라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 여인은 저 검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럼 아까 말한 거 다 너였어?"
내가 묻자 청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의지와 저의 의식은 일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녀의 말투는 놀랍도록 사무적이었는데, 삼천 년을 기다렸다는 존재가 저렇게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하는 게 오히려 신뢰가 갈 정도였다. 감정을 폭발시키며 울부짖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월인데, 저 여인은 마치 방금 출근한 안내원처럼 담담했다. 나는 그 담담함이 진짜 무심함인지, 아니면 삼천 년의 세월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만든 갑옷인지 궁금해졌지만, 지금 그걸 물어볼 여유는 없었다.
나는 검을 천천히 내리며 물었다.
"여기가 어딘데? 나 원래 서울에 있었거든."
청아는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는데, 그 손끝을 따라 공간의 벽면 문양이 서서히 빛을 발하며 지도처럼 펼쳐졌다. 붉은 선들이 벽을 타고 흐르며 별자리 같은 모양을 그려냈고, 그 사이사이로 푸른 빛의 점들이 깜빡였는데, 마치 오래된 천체 관측도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벽 자체는 매끈한 대리석이었지만 표면 곳곳에 균열과 함께 검붉은 이끼 같은 것이 스며들어 있어서, 이 공간이 얼마나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곳은 상고 유적의 봉인지이며, 주인님이 계셨던 세계와는 우주적 거리로 격리되어 있습니다. 지구의 소형 특이점, 그쪽 세계에서는 M12라 불리는 에너지 이상 현상이 이곳과 공명하여 주인님을 이끌어온 것입니다."
나는 그 설명을 듣고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블랙홀 같은 게 나를 여기로 끌고 왔다는 거야?"
청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그 이상 현상이 발생한 순간, 염제의 혼과 공명하는 존재가 필요했고, 주인님이 그 조건에 부합했습니다."
'조건에 부합했다니, 이거 취업 면접 통보받는 기분인데.'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는데,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애초에 나를 겨냥한 일이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스펙 좋은 지원자를 골라 뽑는 것처럼, 어딘가에서 나라는 존재를 데이터베이스에 올려놓고 조건 검색을 돌린 셈인가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오려다 말았다.
"조건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나는 딱히 특별한 것도 없었는데."
내가 재차 묻자 청아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영혼의 파장이 염제의 혼과 유사한 결을 지닌 자, 그것이 조건입니다.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검이 반응했다는 사실만이 증거입니다."
명확한 답이 아니었지만, 명확하지 않은 것투성이인 상황에서 그 정도 대답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검자루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그럼 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고, 청아는 잠시 침묵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간 이동의 원리는 저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주인님의 힘이 완전히 각성하면, 그 가능성이 열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대답이 명확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는데, 지금 당장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있는지 없는지도 불확실한 상태에서, 당장 이 공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채 서 있는 내 처지가 갑자기 실감 나면서 손끝이 다시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애써 무시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좋아, 일단 알겠어. 그럼 이 검이랑 너,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내가 묻자 청아는 처음으로 표정에 아주 미세한 변화를 보였는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주인님을 지키고, 힘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 저의 소임입니다."
그 말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그 안에 담긴 태도만큼은 진심처럼 느껴져서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나?"
나는 짐짓 능글맞게 웃으며 물었지만, 청아는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주인님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감정적 유대는 부차적입니다."
그 건조한 대답에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는데, '이거 완전 AI 비서 같은 캐릭터인데' 하는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조금 더 물어볼 게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럼 정옥공주라는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지금도 어디 있어?"
내가 던진 질문에 청아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는데,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이미 그녀의 무표정에 익숙해져 있었다.
"정옥공주님에 대한 정보는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시기가 아닙니다."
단호하게 선을 긋는 말투에 나는 더 캐물으려다가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삼천 년 묵은 존재가 저렇게까지 딱 잘라 말하는 걸 보니, 그 이름 뒤에 뭔가 만만치 않은 사정이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까지 파고들 여유는 없었다.
"그래, 알겠어. 천천히 물어보지."
내가 검을 완전히 내리며 말한 순간, 청아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걸 보고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주인님, 조용히."
그녀가 낮게 속삭이자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다시 들어 올렸는데, 손바닥에 배어난 땀 때문에 검자루가 미끄러웠다. 방금까지도 조용했던 벽면 너머에서 무언가 무겁게 끌리는 소리와 함께, 이 공간을 향해 접근하는 발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무거웠고, 규칙적으로 바닥을 짓누르는 울림이 마치 거대한 것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리는 신호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