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백 대신 염제로 각성했다

2화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건 코끝을 스치는 낯선 냄새였는데, 흙과 이끼와 알 수 없는 향료가 뒤섞인 그 냄새는 내가 살던 서울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아직 살아있긴 한가 보네.' 나는 그렇게 속으로 안심하며 몸을 일으켰는데, 등 밑으로 느껴지는 건 아스팔트가 아니라 차갑고 매끈한 대리석 바닥이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보니 마치 냉장고 문을 만진 것처럼 서늘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고, 그 이질감이 오히려 이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디테일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주변을 둘러보자 백색과 은빛으로 이루어진 원형 공간이 눈에 들어왔고, 천장 높이가 어림잡아도 십 미터는 넘어 보였으며, 벽면을 따라 붉은빛 문양이 마치 불꽃처럼 새겨져 있었다. 벽 곳곳에는 이끼 낀 흔적도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 공간이 최근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바닥 곳곳에 금이 가 있었고, 그 틈새로 희미한 붉은 빛이 스며 나오고 있어서 마치 이 공간 전체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거 무슨 세트장인가.'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완전히 일으켰는데, 그 순간 시야 한가운데 놓인 물체가 눈에 들어와 온몸이 굳어버렸다. 공간 중앙에 세워진 받침대 위에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는데, 칼날은 붉은빛을 은은하게 발하고 있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태양을 형상화한 듯한 문양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었다. 받침대는 검은 돌로 만들어진 듯 보였는데, 그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 같은 것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어서 마치 박물관 유물 전시대를 보는 것 같았다. '저게 무슨 게임 아이템처럼 생겼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이 저절로 그 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치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언가에 끌려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머리로는 저 검에 다가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 이건 마치 롤러코스터에 탄 채로 안전벨트를 풀려고 애쓰는 기분이었다. 검에 손을 뻗는 순간, 칼날에서 불꽃 문양이 급격히 밝아지며 손끝을 타고 뜨거운 기운이 흘러들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그 검은 내 손에 완전히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손바닥 전체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졌는데, 이상하게도 아프지는 않았고 오히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려 퍼질 정도로 흥분되는 감각이었다. '아, 이거 저주받은 검이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머릿속으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직접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삼천 년의 봉인이 풀렸다. 나를 해방시킨 자여, 그대가 나의 새로운 주인인가.] 나는 그 목소리에 놀라 검을 놓으려 했지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검을 쥔 손끝을 타고 이상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지만 동시에 손바닥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퍼져나가는 이 모순적인 감각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주인이라니, 나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넌 뭐야, 검이 말을 하네." 그 순간 검신에 새겨진 불꽃 문양이 요동치듯 흔들렸고, 목소리는 조금 더 선명해졌다. [나는 천염검. 상고시대 염제와 황제가 구려족의 수장 치우에 맞서기 위해 함께 주조한 신검이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는데, '상고시대에 치우라니, 이거 무슨 역사 다큐멘터리를 검이 읊어주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국사 시간에 잠만 잤던 내가 이런 걸 알아들을 리가 없었으니, 차라리 저 검이 나한테 자기소개서를 써서 건네줬으면 이해가 더 빨랐을지도 모른다는 한심한 생각까지 스쳤다. 하지만 곧 온몸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기운이 심장 근처에서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으로 낯선 장면들이 파편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불타는 벌판,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붉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검을 휘두르며 적진을 가로지르는 모습, 그리고 그 사내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와 겹쳐 보였다. 함성 소리, 말발굽 소리, 불에 그슬린 냄새까지도 마치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감각을 파고들었다. '저게 나야? 아니, 저게 나였다고?' 나는 그 감각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었고, 관자놀이가 터질 듯한 두통이 몰려오면서도 그 기억의 잔상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그대의 몸에 남은 것은 염제의 혼이다. 그대가 바로 나의 진정한 주인이며, 삼천 년 전 소멸한 염제의 환생이다.] 그 말이 끝나자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냉기가 그나마 정신을 붙잡아주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염제라니, 그게 무슨 불의 신이라는 그 염제인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손바닥에 남은 뜨거운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자친구에게 차이고 절망하던 열여섯 살 고등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삼천 년 묵은 신화 속 존재의 환생이라는 말을 들으니 이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차인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신화까지 짊어져야 하는 건가.' 나는 속으로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인생이 꼬일 대로 꼬였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꼬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실타래로 갈아탄 느낌이었다. 나는 검을 다시 살펴보며 물었다. "그럼 넌 계속 여기서 나한테 말 걸 거야?" 검신의 불꽃 문양이 다시 한번 흔들리며 대답이 돌아왔다. [필요할 때마다 대화가 가능하다. 하나, 지금 이 순간 더 급한 문제가 있다.] "급한 문제라니, 또 뭐가 있는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는데, 검은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신 전체가 순간적으로 더 밝게 타올랐고, 그 빛이 손을 타고 팔뚝까지 번지는 게 느껴졌다. 마치 경고등이 켜진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 순간 공간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벽면의 붉은 문양들이 하나둘 빛을 발하며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바닥의 잔진동 정도였던 것이 점점 커지면서,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리석 바닥 전체가 미세하게 울렸다. 벽에 새겨진 불꽃 문양들이 하나씩 붉게 물들며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그 형상이 마치 거대한 뱀이 벽을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거 설마 자동으로 열리는 함정 같은 건가.' 나는 검을 움켜쥐며 몸을 일으켰는데, 손끝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아까보다 한층 더 뜨거워져 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소리도 숨소리도 아닌, 그저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바뀌는 감각.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이 공간 안에 나와 함께 서 있다는 확신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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