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용지물 스킬의 백작 영애

4화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세 번쯤 세다가 결국 포기했다.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가는 길, 계단은 유난히 차가웠다. 맨발로 나무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서, 나는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숨을 죽였다. 복도 끝, 아버지 서재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서재 불이 켜져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일찍 자는 사람이었으니까. 원래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물이나 마시고 방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문틈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경환 님." 계모 윤서인의 목소리였다. "선우 가문 쪽에서 조건이 하나 더 붙었어요." "무슨 조건." "지안이 왕가 쪽 인맥을 좀 만들어줬으면 한다는군요. 대공비 쪽하고 친분이 있다던데." 나는 문 앞에 멈춰 섰다. 손에 든 물컵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건 어렵지 않지. 지안이는 원래 사교계에서 평판이 나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 결혼, 우리한테도 나쁘지 않은 거죠?" 우리한테도. 나는 그 말을 되뇌었다. 우리한테도 나쁘지 않은 거죠, 라니. 마치 내가 이 대화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처럼, 그들은 나를 두고 나를 말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은이가 윤재와 결혼하면 자작가와 연이 생기고, 지안이가 선우 가문과 결혼하면 왕가와도 연이 생긴다. 도림 백작가로서는 최선의 결과야." 최선의 결과. 나는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봤다. 씹어보니 이상한 맛이 났다.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은, 그냥 아무 맛도 없는 맛이었다. "지안이가 【수마법】을 가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버지가 덧붙였다. "뭐, 어차피 얘는 애초부터 정략용으로 키운 애니까. 스킬이 뭐든 상관없었어." 애초부터 정략용. 그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뭔가 뜨거운 게 명치에서부터 올라왔다. 나는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는 벽지의 차가운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서 있는 게 힘들었다. "세은이는 다르잖아요." 윤서인이 말했다. "세은이는 우리 핏줄이고, 【치유마법】도 훌륭하고. 걔는 진짜 후계자로 키워야죠." "당연하지. 지안이는 애초에 후계자로 생각한 적 없어. 그냥 좋은 혼처에 시집보내는 게 목표였으니까." 좋은 혼처에 시집보내는 게 목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말들을 하나씩 삼켰다. 목이 메었다. 삼킬 때마다 뭔가가 목구멍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 집안에서 그냥 결혼 도구였다는 걸. 열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나는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이렇게 선명하게 들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계모가 들어오고, 세은이 태어나고, 그때부터 나는 서서히 밀려났다. 처음엔 아버지도 나를 예뻐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그 시선이 완전히 세은에게로 넘어갔다. 세은이 걷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세은이 처음 말을 뗐을 때 온 저택이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나는 아직도 그 장면들을 기억한다. 그때 나는 구석에 서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스킬을 받던 그날을 기억한다. 신전 앞에 도림 백작가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아버지도, 계모도, 어린 세은도. 발표될 때, 아버지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기억한다. 【수마법】이나 【화염마법】 같은 게 아니라 평범한 스킬이 나왔을 때, 아버지의 얼굴에서 기대가 사라지는 그 순간을. 실망. 그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른 귀족들 앞에서 애써 웃으며 "그래도 괜찮은 스킬이지" 하고 넘겼던 게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웃음이 얼마나 가짜였는지, 나는 그날 이후로 계속 곱씹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 집안에서 조용히 살아왔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문제를 만들지 않고, 그저 괜찮은 혼처를 얻어 조용히 나가는 걸 목표로. 세은이 사고를 치면 내가 대신 사과했고, 세은이 원하는 걸 가지면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게 나의 역할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목표조차, 사실은 내가 정한 게 아니었다.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냥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착한 딸을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발끝으로 걸었다. 부엌에는 가지 않았다. 물이 마시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컵을 그대로 계단 옆 작은 탁자에 내려놓고, 나는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별이 몇 개 떠 있었다. 그중 하나를 응시하며 나는 생각했다. 울까. 조금 울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순간엔 우는 게 정상 아닌가. 드라마에서 보면 다들 이럴 때 운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슬픔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뭔가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가슴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눈물이 나올 자리를 없애버린 것 같았다. 버려짐을 뒤집어쓰는 동안, 도구로 쓰이는 걸 견디는 동안,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인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창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에 뭘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선우 가문. 왕가 방계. 어쩌면 이게 나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이 집에서는 아무도 내가 뭘 원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나는 도구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스스로 그 도구를 어디에 쓸지 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적어도 이 집보다는 나을 거다. 최소한 여기서는 내가 뭘 원하는지 물어봐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서재에서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부터 정략용. 후계자로 생각한 적 없어. 그 말들이 자꾸 반복되면서,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일 아침이 되면,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넬 거다. 그리고 나는 그 웃음을 마주하고,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똑같이 웃어야 할 거다. 그걸 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그걸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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