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용지물 스킬의 백작 영애

2화

그날 오후, 나는 서재로 향했다. 딱히 목적은 없었다. 그냥 사람이 없는 곳에 있고 싶었다. 파혼당한 다음 날 웃으면서 아침 인사를 하는 것도 이제 지쳤다. 하녀들이 나를 볼 때마다 눈치를 살피는 것도, 아버지가 식사 자리에서 나와 눈을 안 마주치려고 애쓰는 것도. 그냥 다 지쳤다. 서재는 도림 백작가에서 사람이 제일 안 오는 곳이었다. 세은은 책 읽는 걸 싫어했고, 아버지는 서류 볼 때나 들어오는 정도였으니까. 나한테는 완벽한 도피처였다. 먼지 냄새가 났다. 오래된 종이 냄새. 이 세계 종이는 그래도 습기는 잘 안 먹는지 곰팡이 냄새는 안 났다. 그거 하나는 다행이었다. 서재 구석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스킬 감정서】라는 제목이었다. 표지가 반쯤 벗겨져서 제목도 잘 안 보일 정도였는데, 뭔가에 이끌리듯 그 책을 뽑아 들었다. 이 세계에서는 태어날 때 신에게서 하나씩 스킬을 받는다고들 했다. 아버지의 【수마법】처럼 강력한 것도 있고, 별 볼일 없는 것도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다. 어릴 때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스킬 좋은 애들은 원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거고, 나는 그냥 시집만 잘 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생각이 완전히 무너졌다. 내 스킬이 뭔지는 사실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좋은 혼처로 시집갈 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스킬 같은 거, 몰라도 사는 데 문제없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그게 신경 쓰였다. 파혼당하고 나니까 뭐라도 붙잡을 게 필요했나 보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조금 떨렸다. 왜 떨리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떨렸다. 두꺼운 책이라 페이지가 많았다. 이름 순서인 것 같아서 '도' 자로 시작하는 부분을 찾았다. 한참을 넘기다 내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찾았다. 【도지안 - 로그인보너스】. 로그인보너스. 그게 뭐지. 처음엔 잘못 봤나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대로였다. 로그인보너스. 진짜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페이지를 더 읽어봤다. '매일 특정 시간에 접속하면 소량의 보상을 받는 스킬. 실전 활용도 낮음.' 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전 활용도 낮음이 아니라 그냥 없는 거 아닌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 옆 페이지에는 다른 사람들 스킬 설명도 있었는데, 【화염마법】은 '전투에 매우 유용, 등급에 따라 파괴력 상승', 【치유마법】은 '생존율 상승에 직접적 기여, 귀족가에서 선호도 높음'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내 건 '실전 활용도 낮음' 딸랑 한 줄.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내 유일한 재능이라고. 신이 나에게 준 거라고는 이게 다라고. 웃기지도 않았다. 세은은 【치유마법】이라는, 누가 봐도 쓸모 있는 스킬을 받았다. 아버지는 【수마법】. 어머니 쪽 혈통이 원래 뛰어난 마법사 집안이었다는데, 나는 그 피를 이어받고도 이런 걸 받았다. 이게 유전이 맞나. 아니면 신이 나 미워해서 일부러 이런 걸 준 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 보고 있어?" 세은이었다. 어느새 서재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언제 온 건지. 나는 순간적으로 책을 덮었다. 굳이 세은한테 이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별거 아니야." 나는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언니." 세은이 다가오며 말했다. "어제 일은...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표정에 죄책감은 별로 없었다. 그냥 형식적인 사과였다. 눈도 제대로 안 마주치고, 목소리에도 진심이라곤 하나도 안 담겨 있었다. 이런 사과, 백 번을 받아도 기분 안 좋아질 것 같았다. "미안할 것 없어. 사랑하는 사람 만난 게 죄는 아니잖아." 내 말에 세은이 조금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 안심하는 표정이 더 얄미웠다. 아, 다행이다, 언니가 화 안 냈네, 하는 그 표정. 나였으면 저렇게 태연하게 못 지을 것 같은데. "근데 지금 뭐 읽고 있었어?" "내 스킬에 대해서." "아, 그거." 세은의 목소리에 순간 미묘한 우월감이 섞였다. "언니 스킬 별로였지, 참." 별로가 아니라 아예 없는 거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굳이 세은한테 로그인보너스라는 이름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알려주면 분명 그걸 가지고 두고두고 놀릴 게 뻔했으니까. "그런가 봐." "난 요즘 【치유마법】 등급이 또 올랐어. 아버지가 엄청 기뻐하시더라." 아버지가 기뻐한다는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은은 눈치도 없이 계속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등급이 어떻게 올랐는지, 마법 스승이 뭐라고 칭찬했는지, 아버지가 어떤 선물을 사줬는지. 나는 그냥 듣는 척하며 다른 생각을 했다. 로그인보너스라니. 이게 진짜 내 전부라니. 세은은 한참 더 자기 얘기를 하다가, 내가 별로 반응이 없으니까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재를 나갔다. 나가면서도 문을 세게 닫았다. 그것마저 얄미웠다. 세은이 떠난 뒤, 나는 책을 다시 펼쳐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찾아봤다. '이 스킬은 하루에 한 번, 접속-이라는 조건이 충족될 때 발동한다. 조건의 정의는 불명확하며 실전 사례가 극히 드물다.' 조건 자체가 불명확하다니. 이게 뭔 소리인지. 책에 적힌 저자도 이 스킬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를 짜맞춰서 써놓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이 세계 최고의 학자들도 모르는 스킬을 내가 가지고 있다니, 이게 자랑인지 뭔지도 모르겠다. 나는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걸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제 이 집안에서 뭘 할 수 있을까. 결혼도 물 건너갔고, 스킬도 무용지물이고, 남은 건 도림 백작가의 장녀라는 이름표뿐이었다. 근데 그 이름표도 이제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파혼당한 순간부터, 그 이름표는 그냥 종이 쪼가리로 변한 것 같았다. 서재를 나서면서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꽂아뒀다. 누가 봐도 상관없었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텐데. 저녁 식사 시간에는 최대한 말을 안 했다. 아버지도 세은도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이 집에서 내가 조용한 건 이제 당연한 일이 됐으니까. 밤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스킬이라는 게, 뭔가 다른 방식으로 발동하는 게 아닐까. '접속'이라는 조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봤다. 로그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한 번 더 해봤다. 이번엔 소리도 살짝 내봤다. "로그인." 방 안에 내 목소리만 울렸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다른 언어로 해야 하나. 아니면 특정 자세를 취해야 하나. 별 시답잖은 생각까지 다 해봤다. 팔을 뻗어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튕겨보기도 했다. 다 소용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도 참 길었다. 파혼당하고, 내 스킬이 쓰레기라는 걸 확인하고. 이보다 더 나쁜 날이 있을까 싶었는데, 다음날 아침이 그 생각을 완전히 틀렸다고 증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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