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성녀궁으로 돌아가는 길목은 유난히 길었다. 한겨울의 저녁 바람이 성벽을 타고 내려와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고, 그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한서아는 박여진과 함께 결계의 균열 지점을 찾기 위해 성벽을 따라 걸었다. 왕궁의 결계는 대대로 신전에서 관리해 온 것으로, 그 정교함이 왕국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이 개입했다는 증거였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궁 전체에 붉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그림자 속에서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성벽의 돌은 낮 동안 받은 볕의 온기를 아직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온기조차 두 사람의 마음을 덥히지는 못했다. "결계가 뚫린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한 게 없어요." 박여진이 벽을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는데, 그것은 한서아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마법사로서의 감각으로도 잡히지 않는 마법이라면, 그것은 상당한 실력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한서아는 그 말을 들으며 손끝으로 벽을 훑었으나, 마법의 흔적이라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계란 원래 흔적을 남기지 않고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오히려 그 자체로 의심스러운 신호였다. 누군가 흔적마저 지울 수 있을 만큼 치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생각에 한서아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고, 박여진은 그런 그녀를 곁눈질로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는 이미 근위병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자세는 지나치게 곧았고, 표정에는 사무적인 딱딱함이 배어 있었다. "성녀님, 국왕 전하께서 직접 뵙자고 하십니다." 근위병의 말에 한서아는 순간 숨이 막혔다. 심문을 위한 일정보다 이른 호출이었고, 그것이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직감했다. 박여진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한서아는 고개를 가로저어 그녀를 막았다. 지금은 함께 갈 수 없는 자리였다.
국왕의 집무실은 회의실보다 훨씬 좁았고, 그만큼 공기도 더 무거웠다. 벽에는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무질서함이 오히려 이 방의 주인이 얼마나 많은 사안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지를 짐작케 했다. 국왕은 창가에 서서 등을 돌린 채 그녀를 맞았는데, 그 뒷모습만으로도 이미 어떤 결론을 내려놓은 듯한 단호함이 느껴졌다. "성녀 한서아." 국왕이 몸을 돌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는가."
그 물음에 한서아는 잠시 망설였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으나, 그날의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성녀 후보 선발식에서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성녀궁 쪽이었다. "그때 나는 그대의 성력 측정치를 보고 놀랐다. 평민 출신이 그런 힘을 지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신전에 재검을 요청했었네." 그 말에 한서아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미묘한 충격을 느꼈다. 자신이 성녀로 인정받기까지, 국왕이 이미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검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그 시절, 자신이 얼마나 순진하게 그 자리를 기쁘게 받아들였는지를 떠올렸다. 평민 출신 성녀라는 소문은 왕국 전역에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그녀를 축복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축복 뒤에서, 국왕은 처음부터 그녀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평민 출신 중에 그만한 성력을 가진 자가 나온 전례가 없었다." 국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대를 지켜보았지. 언젠가 그 힘의 근원이 무언가 온당치 않은 것에서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말에 한서아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국왕의 의심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그녀가 성녀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뿌리 깊은 경계였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실감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향한 왕의 시선이 호의였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실은 관찰과 감시의 연장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이번 사건도 그 연장선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까." 한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국왕은 그 물음에 대답 대신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오랜 세월 쌓인 판단이 서려 있었다. "성녀가 신성을 다뤄야 할 몸으로 세속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대의 자격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세자를 향한 그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국왕의 물음은 심문이라기보다는 오랜 의심의 확인이었다.
한서아는 순간 대답을 찾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해도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사적인 감정과 성무는 별개로 처리해 왔습니다." 그녀가 겨우 목소리를 냈으나, 국왕은 냉소적으로 받아쳤다. "별개로 처리했다면, 왜 그 감정이 왕궁 전체에 퍼지도록 방치했는가." 그 말에 한서아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신이 방치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난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국왕의 논리 앞에서는 그 항변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증거도, 목격자도 없이 오직 그녀의 말뿐인 진실이었다.
"전하." 그때 문밖에서 근위병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궁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소문이 퍼지면서 대신들과 백성들 일부가 몰려와, 성녀의 즉각적인 처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보고에 국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고, 한서아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불안을 느꼈다. 하루의 유예를 받았음에도, 이미 밖에서는 그녀를 심판하려는 움직임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함성이, 마치 파도처럼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국왕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한 물증이 나오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백성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 그 말은 하루의 유예가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했다. 한서아는 그 말을 들으며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방 안의 촛불이 흔들리며 벽에 긴 그림자를 그렸고, 그 그림자는 마치 그녀의 앞날을 미리 그려낸 형상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군중의 소란스러운 함성이, 마치 자신의 운명을 조여오는 올가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