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흑산성 앞에 도착한 건 해가 뉘엿할 무렵이었다.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성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돌을 깎아 쌓은 벽 위로 저녁 햇살이 붉게 걸쳐 있었고, 그 위에 성벽을 따라 늘어선 낡은 깃발들이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게 홍옥령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흑산성이구나.'
며칠을 달려온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추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차 안에서 흔들리느라 온몸이 뻐근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 창을 든 문지기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덩치가 크고 무뚝뚝했고, 다른 한 명은 마르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둘 다 낡은 갑주를 걸치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긁힌 흔적이 많은 걸 보니 실전을 겪은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마차가 완전히 멈추자, 무뚝뚝한 문지기가 먼저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누구시오."
목소리도 걸음걸이만큼 무거웠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옷매를 가볍게 정돈했다.
"서다은입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홍옥령 영주로 부임하러 왔습니다."
두 문지기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눈빛에는 명백한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홍옥령 영주라니." 날카로운 눈매의 문지기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 땅에 영주가 부임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럼 이제부터 들으시면 되죠."
"신분을 증명할 게 있소?"
나는 품에서 위임장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그 순간, 성문 근처에서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한 명은 검을 허리에 찬 건장한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장궁을 멘 마른 남자였다. 둘 다 여행용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문지기들의 것보다는 훨씬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아마 흑산성 주변을 자주 오가는 용병이거나, 그에 준하는 실력자들일 터였다.
"어이, 무슨 일이야." 검을 찬 남자가 문지기에게 물었다. "이 앞에서 뭘 막고 있는 거야."
"강민 씨." 무뚝뚝한 문지기가 답했다. "신원 확인 중입니다. 이 여자분이 자기가 홍옥령 영주라고 하는데요."
강민이라는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다. 평가하는 눈빛이었지, 무례한 눈빛은 아니었으니까.
"홍옥령?"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거긴 사람이 안 사는 땅인데."
"이제부터 살 겁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강민이 옆에 선 궁수를 돌아보았다.
"윤재호, 너 이 얘기 들어본 적 있어?"
윤재호라는 마른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장궁을 어깨에 고쳐 메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듣는데요." 그가 턱을 긁적였다. "근데 그거 좀 신기하네요… 진짜 영주라면, 국왕 폐하 인장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예상했던 질문이네.'
"있어요." 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위임장을 꺼내 펼쳤다.
종이는 두껍고 매끄러운 재질이었고, 하단에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대윤국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위조가 불가능한 인장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품 안에서 몇 번이고 만지작거려 살짝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인장 자체는 흠집 하나 없이 온전했다.
문지기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 이건…" 무뚝뚝한 문지기가 인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진짜 왕실 인장이잖아요."
"그럼 이제 믿으실 건가요." 나는 위임장을 다시 접으며 물었다.
"저, 그게, 죄송합니다!" 날카로운 눈매의 문지기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몰라뵈고, 그,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무뚝뚝한 문지기도 황급히 창을 내리며 자세를 고쳤다.
"저희는 그저 규정대로 확인한 것뿐이라…"
'변명이 길어지는 걸 보니 진짜 당황한 모양이네.'
강민과 윤재호도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진짜 영주였구나." 강민이 팔짱을 끼며 나를 다시 훑어보았다. 이번엔 위아래를 훑는 시선이 아니라, 조금 더 신중해진 눈빛이었다. "근데 그 위임장 하나로 흑산에서 뭘 하시려고요? 여기 사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사정이 있나요?"
"많죠." 윤재호가 끼어들었다. 그는 팔짱을 낀 강민과 달리, 뭔가 초조한 듯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는 마법 쓰는 사람을 대놓고 싫어해요. 성녀님이시라면 그거 좀 곤란할 텐데요."
나는 그 말에 잠시 멈춰 섰다.
'마법을 싫어한다니. 마나가 절반만 통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배척당하는 땅이라는 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미 마나 밀도가 낮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연적인 조건일 뿐, 사람들의 태도까지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 그런 겁니까."
강민과 윤재호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뭔가 말을 아끼는 듯한 낌새였다.
"그건." 강민이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백작님하고도 관련이 있는 얘긴데."
"백작님이요?"
"도하준 백작." 윤재호가 말했다. 그러고는 조금 조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살폈다. "성녀님 결혼 상대잖아요, 맞죠?"
나는 순간 굳었다.
'이 사람들이 그것까지 알고 있다니.'
"어떻게 아셨죠."
"흑산에서는 소문이 빠르거든요." 강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뭔가 체념 비슷한 것이 섞여 있었다. "근데 그 얘기보다 더 급한 게 있어요."
"뭔데요."
강민이 대답 대신 윤재호를 바라보았다. 윤재호는 잠시 망설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성문 너머 산맥을 가리켰다. 산등성이는 이미 저녁 어둠에 잠겨 검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제 저 산맥 너머에서, 목격 보고가 하나 들어왔거든요."
바람이 문득 성벽 너머에서 불어와 내 옷자락을 스쳤다. 그 바람에는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섞여 있었다.
강민이 그 말을 받았다. 목소리가 낮았지만, 그만큼 무게가 실려 있었다.
"드래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