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만족 백작과 결혼하라니

1화

개선식 나흘째, 나는 여전히 왕궁 정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대윤국 전역에서 몰려온 귀족들이 화관을 두르고 축배를 들었고, 병사들은 전공을 자랑하며 목청을 높였다. 나, 서다은은 그 한가운데서 성녀의 사제복을 입은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사제복이라는 게 이렇게 목이 조이는 물건인지는 사흘 전에야 알았다. '이 옷은 대체 누가 디자인한 걸까.' 나는 옷깃을 슬쩍 당기며 생각했다. 전장에서는 갑옷 위에 아무렇게나 걸쳤던 로브였는데, 왕궁에 오니 목까지 단단히 여며진 정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실용성이라곤 없는 물건이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사제 하나가 나를 흘긋거리며 속삭였다.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전장의 마녀'라는 말이 언뜻 섞여 있었다. 나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삼 년 동안 그런 소리는 지겹도록 들었다. 정원에는 개선을 기념하는 조각상들이 새로 세워져 있었다. 대부분이 이헌 왕자를 형상화한 것들이었다. 그중 하나는 창을 들고 마수를 밟고 선 모습이었는데, 실제로 그 마수를 잡은 건 이헌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그 조각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조각상 팔뚝이 좀 두꺼운 것 같은데.' 예술적 감상이 아니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헌 왕자가 단상에 올라섰다. 이헌은 자수정 빛 예복을 입고 있었고, 그 뒤로 시종들이 그의 전공을 나열하는 깃발을 세웠다. 깃발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북방의 수호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정작 그 전공의 팔 할은 내가 세운 것이었지만, 그런 걸 지적할 자리는 아니었다. "이번 전쟁의 승리는," 이헌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직 대윤국 왕실의 위엄과, 나 이헌의 지휘 덕분이었소." 박수가 터졌다. 나는 조용히 손을 모으고 있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대사였다. 옆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나만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나와 함께 북방 전선에서 삼 개월을 버텼던 사람이었고, 그날 밤 마수 무리에 포위되었을 때 내가 직접 그의 팔을 붙잡고 끌어냈다. 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런 표정을 지었다. 말은 못 하고 코웃음만 치는 표정. "그리고," 이헌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자리에서, 서다은 성녀에게 특별한 은혜를 내리려 하오." 순간 주변이 웅성거렸다. 나는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은혜라는 말이 나왔다는 건 좋은 소식이 아닐 확률이 높다.' 전장에서 배운 감이었다. 지휘관이 갑자기 부드러운 말투로 말할 때는, 대개 명령이 부당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헌의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살폈다. 정확히 나였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서다은 성녀는," 이헌이 말을 이었다. "이번 전공을 기려, 흑산 변경백 도하준과의 혼인을 허락받았소." 정원이 고요해졌다. 나도 고요해졌다. '흑산이라니. 그 야만족 백작 말인가.'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헌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미소는 축하가 아니라 처분의 표정이었다. 나는 도하준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굴려보았다. 흑산은 왕도에서 가장 먼 변경, 마수가 가장 자주 출몰하는 땅이었다. 그곳을 다스리는 백작에 대한 소문은 하나같이 흉흉했다. 눈빛만으로 병사를 굴복시킨다느니, 밤마다 늑대와 함께 사냥을 나선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물론 그런 소문의 팔 할은 헛소리일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소문이라는 게 대체로 그렇다. "영광이지 않소?" 이헌이 덧붙였다. "미개한 변경에도 성녀의 은총이 필요할 테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명확했다. 나는 지난 삼 년 동안 전장에서 마수의 피를 뒤집어쓰며 병사들의 목숨을 살렸다. 밤을 새워 상처를 꿰맸고, 열에 시달리는 병사의 손을 붙잡고 새벽을 넘긴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그 대가가 '야만족 백작'과의 강제 결혼이라니. 어이없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주변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대부분이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표정이었다. 몇몇은 이미 도하준에 대한 험담을 나누며 낮게 웃고 있었다. '변경으로 유배 보내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체면치레로 성녀라는 칭호는 챙겨주는군' 같은 말들이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헌이 다시 손짓을 했다. "오채린 영애를 소개하겠소. 나의 새로운 혼약자이며, 이번 전쟁 동안 병사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자비의 성녀요." 금발의 여인이 단상 위로 걸어 나왔다. 담금색 눈이 우아하게 정원을 훑었고,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자비의 성녀라니.' 나는 그 별명을 곱씹었다. 전장에서 오채린을 본 기억이 몇 번 있었다. 후방에서 부상병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잡아주었던 모습. 실제로 그들을 치료한 건 나였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얼굴은 오채린의 것이었다. 오채린이 이헌의 옆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거슬렸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궁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이헌과는 정략으로 묶인 관계였을 뿐, 애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 다," 이헌이 마무리했다. "대윤국의 명예를 위해 헌신해준 것에 감사하오."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그 박수 속에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침착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기서 화를 내면 저들이 원하는 그림이 완성될 뿐이다. 성녀답지 못하게 분노를 터뜨리는 여자, 그게 바로 저들이 원하는 이야기일 테니.'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시 내쉬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단상 위로 성큼 걸어 올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이헌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서다은 성녀, 지금 무슨—" 말이 끝나기 전에 내 오른손이 그의 턱을 정확히 올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헌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고, 뒤에 서 있던 오채린이 그 충격에 놀라 기절하며 쓰러졌다. 정원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엔 정적.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시종 하나가 들고 있던 쟁반을 놓쳤는지, 멀리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손을 툭툭 털며 이헌을 내려다보았다.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영광이라고 하셨죠."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저도 영광스럽게, 답례를 드린 겁니다." 주변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손끝이 얼얼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이거, 생각보다 세게 쳤나 보다.' 이헌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서 미소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붉게 부어오르는 턱과,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진 눈만 남아 있었다. "너, 지금 감히—" "감히라니요."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전쟁터에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흔했습니다. 이 정도는 인사치레로 봐주셔야죠." 주변에서 낮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침묵 사이로, 정원 입구 쪽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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