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만족 백작과 결혼하라니

2화

왕궁 감옥의 독방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돌바닥은 차가웠고, 창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날의 일을 다시 곱씹었다. '왕자를 때렸으니 사형은 아니라도 중형은 각오해야 한다.' 나는 손끝의 얼얼함을 다시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헌의 턱을 올려친 순간의 감각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졌다.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등을 타고 스며들었지만, 나는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도 생각은 해야 했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정말로 목이 잘릴지도 몰랐다. '왜 이헌이 그런 발표를 했을까.' 나는 처음부터 다시 짚어보았다. 전공의 대부분은 내가 세운 것이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나를 '선혈성녀'라 부르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헌이 그 전공을 독차지하려면, 나를 정치적으로 치워야 했다. 간단한 계산이었다. 내가 왕궁에 남아 있는 한, 언젠가 누군가는 진짜 전공이 누구의 것인지 묻게 될 것이다. 병사들의 입에서, 치료받은 자들의 감사에서, 소문은 결국 왕궁 안까지 스며들게 마련이었다. 이헌은 그 싹을 아예 잘라내고 싶었을 것이다. 흑산은 변경 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이었다. 마수가 들끓고, 정령마저 그 땅을 외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도하준이라는 백작은 여러 혼약자들에게 버림받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사교계에서는 그를 두고 '저주받은 백작'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 곳으로, 그런 사람과 나를 묶는다는 건— '나를 완전히 지워버리려는 거구나.' 결론에 다다르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감옥 안에서 혼자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헌은 내가 왕궁에 남아 전공을 다시 언급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오채린을 앞세워 전쟁의 이미지를 재편하고, 나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변경으로 치워버리면 완벽한 그림이 완성된다. 왕궁의 기록에는 오채린의 이름이, 병사들의 기억에는 서서히 옅어질 나의 이름이 남을 것이다. '생각보다 머리를 잘 썼네.' 나는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딱 하나, 놓친 게 있다.' 나는 흑산에 가는 걸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왕궁이라는 곳이 나에게 맞은 적이 없었다. 평민 출신 성녀라는 이유로 사교계에서 늘 뒷말을 들었고, 전장에서 세운 공은 늘 누군가의 이름으로 바뀌어 발표됐다. 파티에 초대받아도 구석 자리에 앉아야 했고, 내가 살린 사람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내 출신은 언제나 기록되었다. 자유롭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변경이라면.' 변경은 왕궁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내가 세운 공을 내 것으로 부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수가 들끓는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내가 잘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도하준이라는 남자도, 어차피 강요당한 입장일 거다.' 나는 냉정하게 계산했다. '나처럼 정치적으로 이용된 거라면, 서로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여러 혼약자에게 버림받았다는 소문도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사람이 그렇게 여러 번 버림받으려면, 그쪽에서 먼저 무언가 잘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상대들이 형편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만나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전에 내가 살아서 감옥을 나갈 수 있느냐였다. 왕자를 때린 죄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사형까지도 논의될 수 있는 일이었다. 왕실의 위엄을 이유로 목이 달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병사들에게 몇 번이나 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나보다 훨씬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다.' 나는 다시 스스로를 설득했다. '없으면 만들어야지.' 감옥 문이 열린 건,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서다은 성녀." 간수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국왕 폐하께서 알현을 명하셨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며칠 갇혀 있었더니 사제복이 꾀죄죄해져 있었다. 소매 끝에 묻은 흙먼지를 대충 털어내며, 나는 이게 알현실에 들어갈 만한 차림인지 잠깐 고민했다. 어차피 다른 옷이 없으니 소용없는 고민이었다. '알현이라니.' 나는 걸으면서 다시 계산을 시작했다. '처형이라면 굳이 알현이라는 형식을 거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뭔가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국왕이 직접 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호였다. 그저 처벌만 내리려는 거라면 서면으로 통지하고 곧바로 집행하면 될 일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겠다는 건, 뭔가를 확인하거나, 뭔가를 요구하려는 뜻이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간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성녀님." 간수가 더듬거렸다. "저희 형이, 그, 남쪽 전선에 있었는데… 성녀님 덕분에 살아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젊은 얼굴이었다. 아마 나보다 몇 살 어릴 것이다. "이름이 뭔데요." "조… 조명석입니다." "기억나요. 다리를 다쳐서 왔던 병사죠." 나는 짧게 웃었다. 그 병사는 다리가 거의 뭉개진 채로 후송돼왔고, 다른 신관들은 절단을 권했지만 나는 끝까지 붙잡고 치료했었다. "잘 살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 형이 지금은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다리는 좀 절긴 하는데, 그래도 걸을 수 있어서… 성녀님이 아니었으면…" 간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목이 메는 듯했다. 감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미 다음 생각으로 넘어가 있었다. '알현실에서 무슨 말을 해야 살 수 있을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국왕에게 약함을 보이는 순간, 내 목숨은 그 자리에서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다. 차라리 당당하게, 내가 왜 이헌을 때렸는지를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설명이 국왕의 귀에 어떻게 들릴지는 또 다른 문제고.' 알현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간수가 문을 두드렸고,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렸고, 국왕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나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옥좌에 앉은 국왕의 손끝이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 리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짜증인지, 흥미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인지. "들어오라." 국왕이 말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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