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만족 백작과 결혼하라니

4화

흑산으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훨씬 험했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에 걸릴 때마다 온몸이 위아래로 튕겨 올랐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갈수록 황량해졌다. 나무는 점점 줄어들고, 그나마 남은 것들도 잎이 반쯤 이상 떨어져 나가 있었다. 마치 이 땅 전체가 무언가에 시달리다 지쳐버린 것 같았다. 마부는 박씨라는 어인이었는데, 물비늘로 덮인 얼굴에 늘 웃음을 걸고 있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손등까지 이어진 비늘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옅은 청록빛으로 반짝였고, 말할 때마다 아가미 비슷한 부분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성녀님, 이 길로 사흘만 더 가면 흑산 초입입니다." 박씨가 채찍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근데 요즘 들어 이 근처 마수가 부쩍 늘었지 뭡니까." "늘었다뇨?" "흑산 쪽은 원래 정령이 안 붙는 땅이라, 마법사들이 잘 안 오거든요. 그래서 마수들이 더 활개를 치는 거죠. 예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정령이 안 붙는다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이죠?" "음, 그, 그러니까요." 박씨가 채찍 끝을 만지작거리며 더듬거렸다. "정령들이 이 땅 자체를 싫어한다고 해야 하나. 여기 흙이랑 물엔 뭔가 안 좋은 게 섞여 있다고들 하더라고요. 저도 잘은 몰라요. 그냥 옛날부터 그런 소문이 있었어요." 나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정령이 안 붙는 땅.'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정령에게 사랑받는 체질이라는 게, 그 땅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인가.' 지금까지 나는 어디를 가든 정령들의 호의를 자연스럽게 누려왔다. 물을 마시려 하면 물의 정령이 먼저 잔을 채워주었고, 밤길을 걸으면 작은 빛의 정령들이 알아서 길을 밝혀주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흑산에서는 그 당연함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마차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으악!" 박씨가 소리쳤다. "윈드울프입니다!" 창밖을 내다보자, 회색 털의 늑대 세 마리가 마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눈빛이 붉게 번뜩였고, 발톱에서 옅은 마기가 흘렀다. 발굽 소리가 아니라 발톱이 땅을 찍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나는 곧바로 마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성녀님!" 박씨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위험합니다, 안에 계세요!" "안 괜찮아요, 이대로 두면." 나는 짧게 대답하고 검을 뽑았다. 첫 번째 늑대가 나를 향해 뛰어올랐다. 나는 손끝에 마나를 모았다. 늘 하던 대로였다. 눈을 감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런데 마나가 평소보다 절반도 모이지 않았다. '뭐지.' 나는 순간 당황했다. 마나가 손끝에서 뭉치다 말고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손에 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것처럼. 그러나 몸이 먼저 반응했다. 검을 고쳐 잡고 늑대의 옆구리를 그었다. 마나 없이도 검술은 충분히 익혀둔 터였다. 늑대가 짧게 울부짖으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두 번째 늑대가 옆에서 달려들었다. 나는 발끝으로 바닥을 밀며 몸을 회전시켰고, 칼끝이 그 목을 스쳤다. 비명이 터졌다. 뜨거운 피가 손등에 튀었지만 닦아낼 틈이 없었다. 세 번째 늑대를 향해 나는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번에도 절반 수준밖에 모이지 않았다. 마치 몸속의 회로 하나가 끊어진 것 같았다. '이 땅에서는 마법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는구나.' 나는 그 사실을 검을 휘두르며 확인했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박씨가 뒤에서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확히 알아들을 여유가 없었다. 늑대의 발톱이 내 옷자락을 스쳤고, 나는 몸을 낮추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간신히 마지막 마나를 짜내어 화염구를 만들어 던졌다. 위력은 평소의 삼분의 일 정도였지만, 늑대를 물러서게 만들 정도는 됐다. 불붙은 털 냄새가 코를 찔렀다. 늑대들이 물러가고, 숨을 몰아쉬며 검을 내렸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박씨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의 물비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나는 검을 다시 검집에 꽂으며 말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나를 무리하게 끌어당긴 후유증인지, 아니면 방금 벌어진 상황에 대한 놀람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방금 그 마나…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 근처에서 마법사가 마수를 이렇게 처리하는 건 처음 봅니다! 저는 그, 정말이지 성녀님이 아니었으면 이 마차도, 저도 다 끝장났을 거예요!" "마법사가 이 근처에 많이 안 오나 보죠." "그럼요." 박씨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산 쪽은 마법이 안 통한다고 다들 꺼려하거든요. 그래서 저 같은 마부들만 오가는 거죠. 저희야 뭐, 이런 걸로 어떻게 할 재주도 없으니 그냥 운에 맡기는 거고요." '안 통하는 게 아니라, 절반만 통하는 거였네.' 나는 속으로 정정했다. 완전히 무력화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위력이 줄어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화염구 하나로 세 마리를 동시에 태워버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한 마리를 물러서게 만드는 데도 힘을 다 써버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검술에 더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마나를 아끼고, 검을 먼저 뽑는 습관을 들여야 했다. "성녀님." 박씨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저 다음 마을까지 가시는 동안 저희 마차를 좀 더 지켜주실 수 있으신가요? 요즘 이 길이 유독 위험해서요. 저 혼자로는 도저히…"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씨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물비늘 사이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보였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나무는 듬성듬성했고, 하늘은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낮게 깔려 시야를 가렸다. 정령이 외면했다는 땅의 풍경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려면, 마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검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끝으로 칼자루를 몇 번 문질렀다. 마나가 부족한 상태에서 얼마나 싸울 수 있는지, 정확히 가늠해봐야 했다. 이대로 흑산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큰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저 멀리 흑산의 성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벽은 생각보다 높고, 검은 돌로 쌓여 있었다. 그 위로 낮게 깔린 구름이 마치 성벽을 짓누르듯 걸려 있었고, 성문 근처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박씨가 마차 속도를 줄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기가… 흑산입니다." 그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