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차인 영애들의 화려한 반란

4화

감시자들이 처소 밖에 자리를 잡은 지 사흘째였다. 처음엔 딱딱한 얼굴의 병사 둘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작은 책상까지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저러다 이불이라도 펴는 거 아닐까. 나는 커튼 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산책하는 것도, 편지를 쓰는 것도 전부 기록했다. 붓을 놀리는 손짓 하나까지도 눈여겨보는 듯했다. 처음에는 신경이 쓰였지만 이내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사람은 참 뭐든 익숙해지는구나. 밥그릇 옆에 앉은 병사가 하품을 하는 걸 보면서, 나도 이제는 저들을 가구처럼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걸 깨달았다. 처소 마당을 걸을 때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사각. 오늘은 몇 걸음을 걸었는지까지 적고 있으려나. 그날 오후, 궁녀 하나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목소리가 낮았다. 감시자들의 귀를 피하려는 듯 몸을 반쯤 돌려 세운 채였다. 한소영이라는 이름의 그 궁녀는 손에 든 빈 찻잔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다연님에 대한 소문인데……" "다연?" 나는 그 이름에 귀를 세웠다. 찻잔을 내려놓던 손이 저절로 멈췄다. "그분이 자작령에서 온 게 아니라는 말이 돌아요." "자작령 출신이 아니라고?" "네, 원래는 그냥 평민 마을 출신인데, 오라비인 한지훈 님이 전하께 무슨 청을 넣어서 급하게 자작 지위를 받았다고……"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자작 지위를 급하게 받았다는 건, 애초에 정비 자격을 만들기 위한 조작이었다는 뜻이었다. 순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어제 대전에서 마주친 다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어색한 손짓, 서투른 걸음걸이. 그건 확실히 진짜처럼 보였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인사말도 두 번이나 더듬었으니까. 연기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몰랐던 걸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설픈 연기라기엔 너무 자연스러웠고, 진짜 순진함이라기엔 상황이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이 얘기 어디서 들었어?" "저희 궁녀들끼리 도는 얘기예요. 확실친 않지만…… 한지훈 님이 재무부 관리랑 은밀히 만났다는 이야기도 같이 돌고 있어요." 재무부. 지위를 사려면 돈이 든다. 나는 그 단어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나는 한소영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슬쩍 쥐여 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공짜로 얻는 게 아니었다. 그러고는 서윤을 찾아갔다. 서윤은 이미 이 소문을 알고 있었다. "나도 들었어." 책상 위에는 이미 뭔가를 적어 둔 종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서윤은 손끝으로 종이를 톡톡 두드리며 나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생각해?" "확실한 건 하나야. 다연이 순진한 피해자라고 단정하기엔, 상황이 너무 딱 맞아떨어져." 서윤이 종이 위에 뭔가를 적어 내려갔다. 글씨가 평소보다 거칠었다. "자작 지위, 갑작스러운 책봉, 그리고 우리 혼약이 파기되는 시점까지. 이게 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절묘해."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무능하다고만 여겼던 이도현이, 사실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이 모든 일을 결정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배후는 누구지. 한지훈일까. 아니면 더 위에 있는 누군가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도현 혼자서는 절대 이런 판을 짜지 못한다. 그 인간은 오늘 저녁 메뉴도 제 손으로 못 고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일단 지켜보자." 서윤이 종이를 접어 서랍 깊숙이 넣었다. "움직이는 건 우리가 궁을 나간 뒤에 해도 늦지 않아." · 그날 저녁, 강혜원 공작부인이 처소를 방문했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다. 감시자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뭔가를 적어야 할지 말지 눈치를 보는 사이, 부인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급히 예를 올렸지만, 부인은 손을 저으며 나를 일으켰다. "됐다, 그런 격식은 필요 없어." 부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서윤을 닮은 눈매였지만, 눈빛만큼은 훨씬 온화했다. 서윤의 눈이 서늘한 강물 같다면, 부인의 눈은 그 강물 위로 내리는 볕 같았다. "서윤이한테 얘기 다 들었다. 조건을 걸고 백지화를 받아냈다고."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잘했어. 아주 잘했다." 부인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손이 작고 따뜻했다. 이런 손을 잡아 본 게 언제였더라. "나는 아이가 서윤이 하나뿐이라 늘 걱정이었다. 그 애가 궁에서 혼자 버티는 게 아닐까 하고." 나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네가 옆에 있어서, 조금은 마음을 놓았단다." 부인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은채야, 앞으로 우리 집에서 지내면 어떻겠니." 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육 년을 왕궁에서 지냈지만, 이렇게 나를 진심으로 반겨준 사람은 없었다. 친아버지도, 궁의 어느 누구도. 다들 나를 이용할 대상으로만 봤지, 그냥 나로 봐준 사람은 없었다. "저를…… 받아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나답지 않게. "그럼. 나는 늘 딸이 하나 더 있었으면 했거든." 부인이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참아야 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에 무너질 만큼 내가 약해져 있었나. 서윤이 방문 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리 둘의 눈이 마주치자, 그 애도 살짝 웃었다. 평소의 도도한 얼굴은 어디로 가고, 어딘가 부끄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엄마, 그만 놀리세요." 서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부인은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감시자들이 밖에서 뭘 적고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 그러나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왕실 게시판에 우리를 둘러싼 소문이 새롭게 붙었다는 말이 들려왔다. "두 여자가 재산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왕태자를 몰아세웠다." 그런 내용이었다. 서윤은 그 종이를 직접 확인하러 갔다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돌아왔다. 걸음걸이부터 심상치 않았다. 문을 여는 손짓조차 거칠었다. "이거 누가 퍼뜨린 거야." "몰라. 근데 이게 한 장이 아니야. 왕궁 곳곳에 붙었대." 시장 어귀에도, 관청 게시판에도, 심지어 궁녀들이 드나드는 후문 근처에도 같은 종이가 붙었다고 했다. 조직적이라는 뜻이었다. 누군가가 우리를 짓밟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종이를 붙일 사람, 붙이는 걸 못 본 척할 사람, 그리고 그걸 지시할 사람까지 필요했다. 나는 그 종이 내용을 곱씹으며, 어제 한소영이 전해준 다연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연결되어 있는 걸까.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불안은 지울 수 없었다. 우리가 궁을 나가기로 결심한 것과, 이 소문이 퍼지는 시점이 이렇게 딱 맞물리는 게 그저 우연일 리 없었다. 누군가는 우리가 조용히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쪽으로—우리가 죄인처럼 낙인찍힌 채 사라지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무슨 짓을 할까. 나는 창밖으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감시자들을 내려다보며, 이 모든 일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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