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협상은 사흘에 걸쳐 이어졌는데, 그 사흘 동안 강서연은 매일같이 별궁으로 향해 선우겸과 마주 앉았고, 그 자리에서 다뤄지는 안건들은 조세 정책부터 국경 무역, 심지어 청하국과 대운제국 간의 문화 교류에 이르기까지 방대했다.
별궁의 접견실은 여느 관청과는 달리 화려하기보다 정갈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창가에 놓인 도자기 화병에는 늘 그날 아침에 꺾은 듯한 생화가 꽂혀 있었고, 강서연은 그것이 누구의 지시로 놓인 것인지 궁금해하다가도 이내 서류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선을 거두곤 했다.
첫날, 강서연은 조세율 조정안을 제시하며 청하국 상인들이 겪는 부당한 세금 부과의 실태를 조목조목 짚었는데, 선우겸은 그 내용을 끝까지 듣고는 곧바로 반박 자료를 꺼내 들어 대운제국 측의 입장을 설명했고, 그 태도에는 흔한 위압이나 회피가 없었다.
"그대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근거를 대시오."
그 말은 냉정했지만 무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서연이 준비한 자료의 허점을 정확히 찔러 그녀로 하여금 다시 자료를 검토하게 만들었는데, 그런 식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강서연은 낯설고도 신기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이 사람은…… 내 말을 정말로 듣고 있어.'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만나왔던 수많은 위정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는데, 대개는 겉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는 이미 결론을 정해둔 채 형식적인 대화를 이어갈 뿐이었으나, 선우겸은 매번 진지하게 반박하고 재검토하며 함께 조항을 다듬어 나갔고, 그런 과정을 거듭할수록 강서연은 자신이 오랫동안 갈망했던 어떤 감각을 되찾고 있음을 느꼈다.
'존중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그 낯선 감정에 강서연은 몇 번이고 당황했는데, 그럴 때마다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며 다시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으로 넘어가곤 했다.
이틀째가 되던 날, 두 사람은 국경 무역로 개설 문제를 두고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누었는데, 강서연이 제안한 세 갈래 경로 중 하나를 두고 선우겸이 지형적 위험성을 지적하자,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도 이내 대안을 떠올려 다시 설명을 이어갔고, 그런 그녀의 순발력에 선우겸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빠르시군."
그 짧은 칭찬에 강서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는데, 그것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느낀 성취감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날도 협상이 끝나갈 무렵, 강서연은 선우겸의 책상 한쪽에 쌓여 있는 원고지 뭉치를 발견하고는 무심코 눈길을 주었는데, 그 순간 익숙한 필체가 시야에 들어와 그녀의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이 글씨는……'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필체였는데, 획을 그어 내리는 방식이나 마침표를 유독 깊게 찍는 습관까지 지나치게 낯이 익어, 그것이 어디서였는지를 기억해내려는 순간 선우겸이 황급히 원고지를 서류 아래로 밀어 넣으며 시선을 피했고, 그 어색한 몸짓이 오히려 강서연의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건……"
조심스레 입을 열자 선우겸은 잠시 침묵하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저 개인적인 취미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방어적 태도가 강서연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가 4년 동안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던 그 소설가의 필명, '설강'이었다.
'설마…… 아닐 거야.'
스스로 부정하려 했지만, 원고지 위에 적힌 몇몇 단어들과 문장의 리듬이 그녀가 그토록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던 그 소설의 문체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고, 강서연은 그 소설을 처음 읽었던 밤을 떠올렸는데, 그때 그녀는 궁에 갇힌 듯한 답답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우연히 손에 넣은 그 책 한 권으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 소설 속 주인공은 신분의 벽에 갇혀 홀로 싸우던 인물이었는데, 그 인물의 대사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해서 강서연은 그날 이후 매달 한 번씩 편지를 써 보냈고, 답장을 받지 못해도 그 편지를 쓰는 순간만큼은 위로받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사람이…… 정말 이 사람이라면.'
강서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폐하께서 쓰시는 그 소설, 제목이 무엇입니까."
순간 선우겸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온 냉정하고 여유로운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요."
되묻는 목소리에서 경계심이 느껴졌지만, 강서연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확신이 들어 손끝을 떨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4년 전부터, '설강'이라는 작가에게 편지를 보낸 독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고, 선우겸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강서연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놀라움과 함께 오랫동안 감춰왔던 어떤 갈망이 뒤섞여 있는 듯했다.
'맞다는 뜻이겠지.'
확신이 가슴을 관통하는 순간, 강서연은 이유 없이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그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가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작가님은 모르실 겁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한 채 강서연은 그 말을 이어갔는데, 그것은 단순히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혼자서 견뎌왔던 외로움을 향한 고백이기도 했다.
"저는…… 그 편지들을 쓰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제 진짜 마음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서연이 시선을 떨구는 순간, 선우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걸어와 조용히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대의 편지들을, 나는 전부 기억하고 있소."
낮고 떨리는 음성으로 건넨 그 말에 강서연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외로웠던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를 알아본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매번…… 그대의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 이 궁 안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소."
선우겸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강서연이 알지 못했던 인간적인 결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그녀의 가슴을 더욱 뻐근하게 만들었는데, 황제라는 자리에 갇혀 그 역시 누군가에게 진심을 말할 곳이 없었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강서연은 그 순간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선우겸의 옆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얼굴이 지금까지 자신이 상상해왔던 '설강'의 얼굴과 겹쳐 보이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숨을 삼켰다.
하지만 그 따뜻한 침묵 속에서도, 강서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불안이 스치고 있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우리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거야.'
청하국과 대운제국 양쪽 모두에서, 황제가 오래전부터 타국의 영애와 익명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스캔들을 넘어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것이 분명했고, 두 나라의 관계가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 지금 이 시기에 그런 소문이 퍼진다면 협상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서연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폐하는 이미 정략적으로 얽혀 있는 몸이 아닌가.'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강서연의 가슴 한쪽이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저려왔는데, 그것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어 더욱 혼란스러웠고, 그저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탁—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종 하나가 창백한 얼굴로 들어서며 다급하게 외쳤다.
"폐하! 청하국에서 급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선우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강서연 또한 불길한 예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는데, 방금 전까지 감돌던 따뜻한 온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방 안에는 다시 차갑고 팽팽한 긴장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