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회상은 늘 사소한 감각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 강서연의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밤바람이 마치 4년 전 그날의 것과 닮아 있어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그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바람의 온도가, 그날 서재의 창틈으로 새어 들던 바람의 온도와 어찌 이리도 같을 수 있는지, 강서연은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어떤 계절의 습성 같은 것이라 여기며 그 기억을 밀어내지 못했다.
열여덟의 강서연이 처음 이하람의 서재에 발을 들였을 때, 책상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정무 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옆에서 이하람은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고, 강서연은 그 무심함이 도리어 자신에게 어떤 역할을 맡기려는 신호임을 그때는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을 뿐이었다.
"이런 건 나보다 그대가 잘하잖소."
웃으며 건넨 그 말이, 처음에는 단순한 신뢰의 표현이라 믿었는데, 그로부터 4년이 지나는 동안 강서연은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것이 신뢰가 아니라 그저 편리한 도구를 발견한 자의 안도였다는 것을.
그날 이후로 서재의 등불은 강서연이 앉은 자리에서만 밤새도록 밝게 타올랐고, 이하람은 언제나 그 불빛이 꺼지기 전에 먼저 잠자리에 들었으며, 아침이 되면 완성된 문서들을 훑어보고는 흡족한 얼굴로 서명만을 남겼다.
밤을 새워 조약문을 다듬고, 세금 정책을 재설계하고, 이웃 나라와의 외교 서신을 대신 작성하면서도, 강서연은 그 모든 결과물에 자신의 이름 대신 이하람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는데, 처음 몇 번은 억울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억울함마저도 무뎌지고 말았다.
한번은 국경 지역의 조세 개편안을 두고 대신들이 격론을 벌였는데, 강서연이 밤새 작성해 올린 초안이 그대로 통과되었을 때도, 조정의 누구도 그 글씨가 누구의 손끝에서 나왔는지 묻지 않았고, 이하람은 그저 회의석상에서 자신이 오래 고민한 결과라는 듣기 좋은 말로 마무리를 지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몇 번이고 삼켰던 밤들이 있었고, 그런 밤이면 강서연은 유일하게 자신만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붙잡았는데, 그것은 바로 필명 '설강'이라는 낯선 소설가가 써내는 모험 이야기였다.
대운제국에서 넘어온 그 소설은 정교한 세계관과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로 청하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은밀히 회자되고 있었는데, 강서연은 그 글을 읽는 동안만큼은 자신이 누구의 대리인도 아닌, 그저 한 명의 독자로 존재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홀로 검을 벼리는 여인이었고, 그녀가 끝내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우뚝 서는 장면을 읽을 때마다 강서연은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통증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밤이 깊어 촛불이 다 타들어가고 서재의 문서 더미가 조금씩 줄어들 때쯤, 강서연은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종이만은 정무 문서가 아니라 그 소설의 다음 장을 위해 아껴두었고,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새벽까지 붓을 놓지 못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익명으로 몇 번이고 그 작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바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마음을 어딘가에 흘려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가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작가님은 아마 모르시겠지요.'
그렇게 적어 보냈던 편지들이 몇 통이었는지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들이 지난 4년간 강서연이 스스로를 지탱해온 유일한 끈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가끔은 답장이 올까 기대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강서연은 스스로를 나무라며 그런 기대조차 사치라고 되뇌었고, 어차피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누군가의 이름 뒤에 숨어 존재하는 삶뿐이라 여겼기에 그 기대를 오래 붙잡지 않았다.
와장창!
현재로 돌아오는 강서연의 정신을 깨운 것은 다시 한 번 이하람이 무언가를 내던지는 소리였는데, 이번에는 그의 곁에 서 있던 여인, 한서리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얄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깨진 잔의 파편이 대리석 바닥 위로 흩어지는 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연회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서연에게로 쏟아졌고, 그녀는 그 수많은 눈길 속에서도 등을 곧게 세운 채 서 있으려 애썼다.
"저하,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저런 여자에게 화를 내는 것도 아깝지 않으세요?"
조롱 섞인 말투에 강서연의 얼굴이 화끈거렸는데, 한서리는 이하람의 새로운 약혼자였고, 그 사실을 강서연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 셈이었다.
한서리의 목소리는 다정하게 들릴 만큼 나긋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날카로움이 강서연의 가슴을 정확히 찔러왔고,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온 사람처럼 그녀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언제부터……'
의문이 스쳤지만 그것을 물어볼 자격조차 이제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고, 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그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지난 4년, 자신이 밤을 새워 써 내려간 문서들 위에 이하람의 이름이 새겨지던 그 무수한 순간들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다른 무언가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 채워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강서연은 손끝이 서서히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강서연, 그대는 이제 이 궁에서 물러나시오. 청하국의 왕세자비 자리는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소."
이하람의 마지막 선언이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동안, 강서연은 자신을 향한 수백 개의 시선 속에서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지난 4년간 자신이 바쳤던 밤들이, 자신의 이름 대신 남겨진 서명들이, 스스로 삼켜야 했던 수많은 말줄임표들이 한꺼번에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강서연은 그 무엇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그 순간을 견뎌내야 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고, 누군가는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는 듯도 했으나, 대부분의 시선에는 이미 정해진 결말을 지켜보는 자들의 무심함이 배어 있었으며, 강서연은 그 냉담한 공기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철저히 혼자였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이 모든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선우겸의 시선이, 여전히 강서연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연회장의 소란과 조롱의 웃음소리,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수백 개의 시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오직 그 한 사람의 눈길만이 흔들림 없이 강서연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강서연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너져가는 자신을 붙잡는 데에만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