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필명은 황제였다

1화

청하국 왕궁의 대연회장은 수백 개의 촛불로 밝혀져 있었고, 그 아래 오가는 귀족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낮게 깔린 현악 연주가 뒤섞여 나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그 한복판에서 강서연은 유독 자신에게로 향하는 낯선 시선 하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대운제국의 황제 선우겸. 스물여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냉혈하다는 소문으로 이름을 떨치는 자였고, 오늘 이 자리에도 그저 형식적인 외교 사절로 참석했을 뿐이라고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가 연회가 시작된 지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강서연이 서 있는 쪽으로 곧게 걸어오고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촛불 아래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넘겨져 있었고, 그 아래 자리한 눈동자는 마치 깊은 밤의 호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짙어서, 그 눈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이 저도 모르게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왜 하필……' 속으로 의문을 삼키기도 전에 그는 이미 그녀의 앞에 멈춰 서 있었고, 주변에 있던 이들의 대화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드는 것을 강서연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방금까지도 부채를 흔들며 웃고 있던 귀부인들조차 입을 다물었고, 저 멀리서 술잔을 나르던 시종들의 발걸음마저 어느 순간 조심스러워졌는데, 그 모든 정적의 중심에 강서연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다. "강 영애." 낮고 담담한 음성이었지만, 그 짧은 두 마디에 실린 무게가 예사롭지 않아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고, 황제라는 자가 타국의 영애에게 먼저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라는 걸 알기에 주변의 시선이 더욱 날카롭게 쏘아지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 폐하." 최대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지만, 손끝은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선우겸의 눈동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지켜봐 온 사람처럼 어떤 익숙함을 담고 있어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강서연의 가슴 한구석이 이유 없이 뻐근해지고 말았다. '처음 뵙는 분인데……' 분명 오늘이 초면이었다. 대운제국의 사절단이 청하국에 도착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강서연 역시 궁정 연회에서든 사교 모임에서든 저 얼굴을 마주친 기억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저 눈빛에서 느껴지는 낯익음은 대체 무엇 때문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대의 지난 보고서를 인상 깊게 읽었소." 보고서라는 말에 강서연은 순간적으로 표정을 가다듬는 데 실패했는데, 그것은 이하람의 이름으로 청하국이 대운제국에 보낸 통상 조약 관련 문서였고, 실은 그 문서를 밤을 새워 작성한 사람이 다름 아닌 강서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궁정 안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겨울, 이하람이 술에 취해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문서를 대신 정리하며 시작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탈자를 고치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조약의 세부 조항까지 강서연의 손끝에서 다시 쓰이고 있었고, 이하람은 완성된 문서에 자신의 이름만 적어 넣으며 그 공을 당연하게 취해 갔었다. '설마 알고 계신 건가……' 그런 의문이 스치는 것도 잠시, 선우겸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를 떠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서연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옅은 백단향이 머물러 있었는데, 그 향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강서연은 방금 나눈 짧은 대화의 의미를 곱씹으며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것을 느꼈고,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웅성. 주변에서 낮은 소음이 번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는데, 대운제국의 황제가 어째서 유독 강서연에게만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한 온갖 추측들이 삽시간에 연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저 문서, 이하람 저하께서 직접 쓰셨다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상하지 않아? 폐하께서 저렇게까지 관심을 보이실 정도라니……" 귓가에 스치는 속삭임들이 강서연의 가슴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는데, 사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과 침묵해야 한다는 오랜 습관이 동시에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음이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낯익은 목소리가 연회장 중앙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강서연." 이하람이었다. 청하국의 왕세자이자 강서연의 약혼자였던 그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 걸음에서부터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강서연의 가슴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평소라면 술기운에 흐트러진 걸음이라 여기고 넘겼을 텐데, 오늘은 그 눈빛부터가 달랐다. 마치 오래 참아온 무언가를 이 순간 터뜨리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그의 시선은 강서연을 지나쳐 방금 떠난 선우겸의 뒷모습을 향했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와 박혔다. "저하……" 조심스레 그를 부르는 순간, 이하람은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쨍그랑!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고, 그 정적 속에서 이하람은 강서연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와의 혼약을 파기하겠소." 순간 강서연의 귓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실제의 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의 심장이 만들어낸 환청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파기……라니……' 말줄임표로만 채워지는 생각 속에서 강서연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이하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4년이라는 시간이 이 한마디로 이토록 쉽게 부서질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대체 왜 이 자리에서……' 하다못해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라도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대운제국의 황제가 자리를 뜨자마자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파혼을 선언하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강서연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침묵을 마치 무능함의 증거로 받아들인 듯 이하람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4년 동안 내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그저 얼굴만 예쁜 인형처럼 서 있었을 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서연의 머릿속에는 밤을 새워 써 내려간 문서들과, 이하람의 이름으로 올라간 수많은 보고서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정작 그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이 더욱 서글프게 다가왔다. '그 문서들은 대체 누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강서연은 그저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회장 한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는데,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강서연은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려드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 뒤로, 누군가의 손이 강서연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는데,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낮고 단단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파혼이라 하셨습니까, 이하람 저하." 방금 자리를 떠났던 것으로만 알고 있던 선우겸이, 어느새 다시 강서연의 뒤에 서 있었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