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당신이 나를 지명했다니

5화

쪽지를 손에 쥔 채로 서연은 몇 번이나 그 글씨를 다시 읽었는데, 짧고 무뚝뚝한 문장 하나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들썩이게 할 줄은 몰랐다. "내일 오후, 시장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오." 그 한 줄뿐이었다.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연은 그 종이를 몇 번이나 접었다 펴며 글자의 획을 손끝으로 따라 그려보았는데, 그것이 마치 아주 귀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다뤄지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저택에 온 이후 처음으로 허락된 바깥나들이였고, 그 사실만으로도 서연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의 무늬를 몇 번이나 세었는지 모른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 안의 가구들을 푸르게 물들이는 걸 지켜보다가, 문득 자신이 이렇게 사소한 일에 들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다. '겨우 시장 나들이인데.' 그렇게 되뇌어 보아도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시녀 두 명이 동행하기로 했지만 강혁은 뜻밖에도 자신이 직접 마차에 함께 오르겠다고 나섰는데, 그 결정에 시녀들조차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님이 시장에 나가시는 건 처음 봐요." 한 시녀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를 서연도 들었지만, 굳이 이유를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마차에 오르며 강혁이 서연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은 크고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서연은 그 손을 잡기 전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손끝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은 뜻밖에도 따뜻했다. 영지의 시장은 서연이 살던 백작가 근처보다 훨씬 활기가 넘쳤는데, 좁은 골목 사이로 상인들의 외침과 짐마차 바퀴 소리가 뒤섞여 정신없이 흘러갔다. "싱싱한 생선이오, 오늘 아침에 잡은 거요!" "직물 좋소, 좋은 값에 가져가시오!" 곳곳에서 들려오는 외침들이 서연의 귓가를 어지럽혔지만, 그마저도 반가웠다. 서연은 오랜만에 마주한 그 소음과 냄새—구운 빵, 젖은 흙, 향신료가 섞인 냄새—에 코끝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끼며,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노점마다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는 서연의 눈은 반짝였는데, 색색의 천 조각을 파는 가게 앞에서는 한참을 서서 손끝으로 결을 만져보기도 했고, 말린 꽃잎을 파는 노파의 바구니 앞에서는 향을 맡느라 눈을 감기도 했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서연에게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였다. 강혁은 그런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굳이 앞장서지도 않고 뒤에서 보호하듯 걷기만 했는데, 그 거리감이 오히려 서연에게는 낯설고 편안한 배려로 느껴졌다. 가끔 상인들이 강혁을 알아보고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건넬 때마다, 서연은 그가 이 영지에서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새삼 깨닫곤 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그는 그저 조용히 곁을 지키는 한 사람일 뿐이었다. 한 노점 앞에서 서연이 작은 유리 세공품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 마차 바퀴가 진흙탕에 걸려 튀어 오른 흙탕물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강혁이 재빠르게 팔을 뻗어 서연의 허리를 감싸며 몸을 옆으로 당겼는데, 그 바람에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서연의 어깨가 그의 가슴팍에 닿고 말았다. 흙탕물은 다행히 두 사람을 비껴갔지만, 서연은 그 짧은 순간 강혁의 심장이 생각보다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옷깃 너머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도... 심장이 뛰는구나.' 당연한 사실인데도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져, 서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감추려 얼른 몸을 떼어냈다. 주변 상인들이 흘깃거리는 시선도 그제야 느껴졌다. 누군가는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가렸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서연은 그 시선들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는지를 깨닫고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강혁 역시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는데, 품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체온과 옷 사이로 느껴지는 가느다란 어깨선이 예상보다 훨씬 선명하게 다가와서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에서 사람의 몸을 다루는 데 익숙했던 그였지만, 이렇게 작고 조심스러운 존재를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이 낯선 긴장감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칼자루를 쥐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무게도 없는데 이렇게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괜찮소?" 그가 애써 무심한 척 묻자,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는데,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이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다는 걸 서로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강혁은 슬쩍 손을 풀며 뒤로 반걸음 물러섰는데, 그 짧은 거리조차 왠지 아쉬운 것 같아서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아쉽다니, 무슨.' 그는 그 생각을 서둘러 지워버리려 했지만, 손끝에 남은 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에도 두 사람은 시장을 계속 돌아다녔지만, 서연은 조금 전의 그 순간을 계속 곱씹느라 노점의 물건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강혁 역시 평소보다 말이 없었는데,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서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의 낯선 온기를 곱씹었는데, 그 온기가 이상하게도 이 결혼이 단순한 감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기대를 슬며시 부풀렸다. 마차의 흔들림에 몸이 살짝 기울 때마다, 맞은편에 앉은 강혁의 무릎이 가까워지는 것도 이제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자신이 서연이 아니라 서인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다시 목을 조여왔다. '언제까지 이 이름을 빌려 살아야 하는 걸까.' 창밖으로 스쳐가는 영지의 풍경—낮은 지붕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 그 위로 낮게 깔린 하늘—을 바라보며 서연은 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오래 남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 불안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고, 문이 열리자마자 낯선 얼굴의 손님 한 명이 이미 저택 앞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단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중년 여인이 서연을 향해 다가오며, 반가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인의 걸음걸이는 우아했지만 그 안에 뭔가 날카로운 것이 숨어 있는 듯했고, 미소를 짓고 있는 입가와는 달리 눈빛은 서연의 얼굴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훑어 내리듯 살피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서인아." 그 순간 서연의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았는데, 그 여인의 얼굴을 그녀는 분명 어디선가—서인의 어릴 적 이야기 속에서—들어본 적이 있었다. 누구였을까. 저 다정한 목소리와 낯익은 눈매, 어디선가 분명히 마주쳤을 법한 그 인상이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뒤섞여 도무지 형체를 이루지 못했다. 강혁 역시 그 여인을 알아본 듯,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금까지 서연의 어깨에 닿았던 그 손이, 이제는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슬쩍 끌어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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