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로 강혁은 서연을 볼 때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눈빛을 던졌는데, 그것이 경계인지 관심인지조차 서연은 구별해내지 못했다.
다만 그가 식사 자리에서 예전보다 조금 더 길게 그녀를 바라본다는 것만은 확실했고, 그 시선이 닿을 때마다 목덜미가 저절로 뜨거워지는 걸 서연은 억지로 무시하려 애썼다. 포크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들킬까 봐 그녀는 애꿎은 수프만 몇 번이고 떠먹었는데, 정작 국물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머무는 이유가 무엇일지 서연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 지하실에서 본 것을 후회하는 걸까. 아니면 그날 밤 자신이 보인 반응이 어딘가 거슬렸던 걸까. 생각이 그쪽으로 흐를 때마다 서연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렇게 속으로 되뇌면서도, 그녀는 은근히 강혁의 얼굴—가면 아래로 드러난 눈매와 턱선—을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연이 건네준 연고 상자에 대해 강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부터 그의 등에 남은 상처 위로 그 연고가 발라진 흔적을 시녀들이 은근히 언급하곤 했다.
"공작님이 그런 걸 쓰시는 건 처음 봐요."
시녀 하나가 별 뜻 없이 흘린 그 말에, 서연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 화제를 돌렸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상한 안도감이 스몄다. 그가 정말로 그 연고를 발랐을까. 상처가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없어 서연은 손에 든 찻잔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찻잔의 매끄러운 표면이 손끝에 서늘하게 감겨 왔다.
강혁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날 밤 서연이 보인 반응은 그가 지금까지 만나온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지하실의 자객, 등판의 상처, 피 냄새로 가득한 방—이 모든 것을 목격한 여자라면 마땅히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그를 짐승 보듯 피해야 정상이었다. 그는 이미 그런 반응에 익숙했다. 시녀들조차 그의 등을 볼 때면 흠칫 물러서곤 했으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두려움 대신 걱정을 먼저 내비쳤고, 그것도 아주 서투르게, 마치 자기 자신조차 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손끝으로 상처 주위를 가리키며 무어라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서인이...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강혁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곧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초상화 속 그 여자는 늘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저택 안을 걸어 다니는 여자는 사소한 것에도 얼굴빛이 바뀌고,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를 참는 얼굴을 자주 지었다.
애초에 서연이 자신이 알고 있던 초상화 속 여자와 얼마나 다른지, 그는 처음 마차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여자의 눈에 스치던 낯선 당혹감—그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정략혼으로 맞이한 여자가 자신의 얼굴조차 낯설어하는 그 순간을.
다만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굳이 캐물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걸, 그는 오랜 세월 이 저택의 그림자 속에서 배웠으니까.
며칠 뒤, 강혁은 서재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창밖 정원을 서성이는 서연의 모습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녀는 시녀 없이 홀로 나와 마른 나뭇가지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뒷모습이 마치 좁은 유리 항아리 안에 갇힌 작은 짐승 같아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조금씩 흔들렸고, 그 움직임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여서 강혁은 손에 쥔 서류를 그대로 내려놓고 말았다.
강혁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문득 자신이 이 여자를 이 저택 안에 계속 가두어두는 것이 옳은 일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서연이 정원의 어느 한 구석—시든 장미 덤불 앞—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것을 그는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같은 자리, 같은 각도로 서서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그것이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사람의 습관 같아 보였다.
'가둬두려 데려온 것이 아니었는데.'
그 생각 끝에 그는 서류를 밀어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서재 안에 낮게 울렸다.
서연은 정원 한켠에서 시든 장미 덤불을 바라보며 고향의 정원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어릴 적 뛰어놀던 그 정원의 냄새—젖은 흙과 풀 냄새가 이상하게도 지금 이 낯선 땅에서도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강혁이 이미 코앞에 서 있었다. 그의 걸음이 어찌나 조용했는지, 서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산책을 좋아하시오?"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연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네... 아, 그냥... 바깥공기가 그리워서요."
그 대답에 강혁은 잠시 침묵했다가, 은색 가면 아래로 드러난 눈매를 슬쩍 좁히며 입을 열었다.
"이 저택 안이 그렇게 답답했소."
질문인지 확인인지 모를 그 말투에, 서연은 순간 이것이 벌인지 시험인지 몰라 겁을 먹었지만, 이상하게도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어졌다. 거짓을 말하면 오히려 이 남자가 더 깊이 캐물을 것 같았고, 그 시선을 견디는 것보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금... 숨이 막힐 때가 있어요."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 서연은 얼른 고개를 숙였는데, 강혁의 얼굴에서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 골몰하는 듯한 표정이 스치는 걸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그의 눈매가 잠시 먼 곳을 보는 듯 흐려졌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강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겠소."
그 짧은 한마디를 남긴 채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서재로 돌아갔는데, 서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사람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넓은 어깨와 곧은 등, 조금 전까지 그녀를 향해 있던 눈빛과는 전혀 다른, 무심한 뒷모습이었다. 저 등 어딘가에 아직 다 낫지 않은 상처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연은 그 등을 따라가 무어라 더 말을 붙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다만 그날 저녁, 식탁 위에 놓인 쪽지 한 장이 그녀의 궁금증에 아주 작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자리에 앉으려던 서연은 그녀의 자리에만 유독 놓인 그 작은 종이를 발견하고 잠시 숨을 멈췄다. 시녀도 없이, 오직 그 쪽지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쪽지에는 짧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일 오후, 시장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오.'
글씨는 반듯했고, 필압이 세서 종이 뒷면까지 살짝 눌린 흔적이 있었다. 그 글씨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서연은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는데, 동시에 이 허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하나 확실한 건, 내일이면 저 답답한 저택의 문을 나설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