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약파기? 가문은 지킵니다

4화

본가에 이 사실이 알려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소문이라는 건 나쁜 쪽으로 퍼질 때는 광속인데, 좋은 쪽으로 퍼질 때는 굼벵이보다 느렸다. 진짜 불공평하다. 나쁜 소문은 무슨 최신 스마트폰 신제품 출시 소식처럼 하루아침에 온 가문에 퍼지는데, 좋은 소문은 우체국 파업 기간에 보낸 편지처럼 하염없이 지체됐다. 나는 그동안 매일 뒤뜰에서 영술을 연습했다. 검은 안개를 손끝에서 피워 올려 까마귀 모양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여우 모양으로 바꿨다가, 어떤 날은 그냥 뭉텅이로 만들었다가 흩어버리길 반복했다. 딱히 목적이 있는 연습은 아니었다. 그냥 손끝이 심심했고, 마음도 심심했다. 까마귀는 자꾸 부리가 뭉개졌다. 여우는 다리가 네 개가 아니라 여섯 개씩 자라났다. 안개라는 재료 자체가 형태를 오래 유지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혼자 중얼거렸다. "이건 뭐 점토도 아니고." 그러던 어느 날, 뒤뜰 우물가에서 낯선 노년의 여인과 마주쳤다.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빨래를 하고 있던 여인이었는데, 마침 그때 나는 손끝에서 검은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장면이었다. 요즘 세상으로 치면 아파트 화단에서 혼자 부적 태우고 있는 사람을 목격한 셈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가씨, 그 재주 참 곱네." "...누구세요?" "박씨라고 하네. 본가에서 일하는 시종일세." 박씨 부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람도 우리 가문처럼 십이대가 본가의 방계 출신이었다. 다만 나이가 든 지금은 시종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방계 출신이 시종으로 늙어간다는 것도, 이 가문의 족보를 조금만 뒤져보면 흔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핏줄은 다 이어져 있는데 서열은 칼같이 갈리는, 그런 구조. "소문 다 들었네. 억울하겠어."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있나.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나는 그 말에 그냥 웃었다. 얼굴에 다 쓰여 있다니. 나는 포커페이스에는 나름 자신 있는 편이었는데, 이 아주머니는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박씨 부인은 빨래를 마저 짜면서 말을 이었다. 방망이로 두들기는 소리가 물소리랑 섞여서 리듬감 있게 울렸다. "내 아들이 요마 토벌군에 있네. 국경 쪽에서 요마 상대하느라 늘 배고프다고 편지를 보내와." "토벌군이요?" "응. 그런데 아가씨, 그 재주로 음식에 영기를 담을 수 있으려나?"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해본 적은 없는데... 시도는 해볼 수 있어요."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아들놈 먹을 주먹밥에 영기 좀 넣어주게. 요즘 국경 쪽 사정이 안 좋다는데, 기력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근데 저 아직 검은 안개밖에 못 다뤄봤는데요. 이거 넣으면 주먹밥이 아니라 저주 인형 되는 거 아니에요?" "해봐야 알지. 아가씨 재주면 뭔가 다를 것 같은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박씨 부인은 그제야 처음으로 웃었다. 주름이 눈가에 잔뜩 잡히는, 오래 웃어본 사람의 웃음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부엌에서 처음으로 음식에 영술을 걸어봤다. 재료는 평범한 쌀과 소금, 참기름 조금. 손끝에 감각을 모으면서 이번엔 뭔가 다른 감정을 실어봤다. 걱정, 응원, 그런 따뜻한 마음. 평소에 까마귀나 여우를 만들 때 쓰던 마음가짐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그냥 무無를 흩뿌리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뭔가를 담아 보내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안개가 검은색이 아니라 흐릿한 금빛으로 변했다. 와, 색깔도 바뀌네. 이게 무슨 원리인지는 나도 정확히 몰랐다. 그냥 마음가짐이 바뀌면 안개의 색도 따라 바뀌는 건가, 하는 어렴풋한 추측만 있었다. 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여긴 화학 시간도 아니고 물리 시간도 아니니까. 주먹밥 위에 금빛 안개를 살짝 씌우자 밥알이 은근하게 빛을 냈다. 마치 밥알 하나하나에 아주 작은 반딧불이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손으로 살짝 건드려봤는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따뜻했다. 사람 체온 정도로. 박씨 부인은 그걸 받아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눈물을 글썽였다. "이거... 진짜 귀한 걸세, 아가씨. 요즘 이 정도 영기 음식은 본가 큰 어르신들도 쉽게 못 만드시는데." "그런가요?" "그럼. 이런 재주를 가진 아가씨가 왜 그런 헛소문에 시달리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곁눈질로만 보던 세상에, 처음으로 순전히 호의만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이 생긴 셈이었다. 딱히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그 말 한마디가 며칠간 쌓인 피로를 조금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박씨 부인과 종종 우물가에서 마주쳤다. 정확히는 내가 일부러 그 시간에 뒤뜰로 나갔다. 딱히 약속한 것도 아닌데, 서로 그 시간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매번 겹쳤다. "오늘은 뭘 만들어봤나?" "소금 간 좀 세게 해서 주먹밥이요. 아드님 편지엔 뭐라고 써 있었어요?" "밥이 부실하다고, 매일 그 소리야. 그래도 살아있다는 소리니까 다행이지." 박씨 부인은 내게 요마 토벌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나는 그 대신 새로 만든 영기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소소한 거래였지만, 나에게는 그 몇 마디가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 사는 온기였다. 이 집안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가 검사받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대화 같았다. "국경 쪽 요마들은 예전보다 더 사나워졌다고들 하네. 젊은 애들이 많이 다쳐서 돌아온다지." "위험한 일이네요, 진짜." "위험하지. 그래서 이렇게라도 기력을 보태고 싶은 게지. 어미 마음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나는 그 말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미 마음이라는 게 뭔지 나는 잘 몰랐다. 하지만 박씨 부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 절실함만큼은 알 것 같았다. "참, 아가씨." 박씨 부인이 어느 날 문득 말을 꺼냈다. 평소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조금 낮아져 있었다. "조심하시게. 요즘 서은채라는 여인이 본가 쪽에도 손을 뻗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손끝에 맺혀 있던 금빛 안개가 잠시 흔들리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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