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울고 나니 이상하게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눈물이 무슨 리셋 버튼도 아닌데,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감정이 한 단계씩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회사원이었던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억울함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부장한테 억울하게 혼나도 사표를 던지는 게 아니라 메일을 다시 확인하고, 카톡 캡처를 저장해두는 게 사회인의 자세였다. 억울하면 증거를 모으고, 증거가 없으면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내가 배운 유일한 생존 스킬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진 명분이라는 게 뭐가 있나 생각했다. 신분도, 인맥도, 돈도 지금 당장은 다 애매했다. 결국 남는 건 하나였다. 실력. 남들 눈에 보이는 성과.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문득 학당 서첩 한 귀퉁이에서 봤던 문장을 떠올렸다.
"영술 수업, 자유 참관 허용."
영술. 이 세계 사람들이 마법 대신 부르는 말.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판타지 세계에 왔으니 마법 비슷한 게 있는 거겠지,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명예를 회복할 방법이 필요하다면, 남들 눈에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 말고 뭐가 있겠나. 소문은 말로 퍼지지만, 재능은 눈으로 보여야 믿는 법이니까.
다음 날 나는 학당 뒤뜰에서 열리는 기초 영술 수업에 몰래 참관했다. 담을 넘은 건 아니고, 그냥 뒤뜰 구석 나무 밑에 서 있었을 뿐인데도 몰래 참관하는 기분이 들었다. 학생들 열댓 명이 반원으로 둘러앉아 있었고, 선생이라는 사람이 그 앞에서 손끝에 작은 불꽃을 피워내며 설명했다.
"영기는 심상과 감정의 응결체다. 강한 감정 없이는 발현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하나둘 손끝에 작은 빛을 만들어냈다. 노란 불씨, 옅은 초록빛 잎사귀 모양, 물방울처럼 맺히는 파란 기운. 저마다 색이 다르고 형태가 달랐다. 나는 그 광경을 나무 그늘에 숨어서 구경만 했다. 딱히 뭘 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냥 신기했다. 초등학생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요요를 처음 봤을 때랑 비슷한 기분이었다.
강한 감정이라. 나는 그 순간 지난 며칠간 쌓인 억울함과 분노를 떠올렸다. 소문에 시달리며 삼켰던 말들, 눈을 피하던 아이들의 얼굴, 부친의 서재에서 느꼈던 그 무거운 공기까지. 그리고 그냥, 손끝에 그 감정을 밀어 넣어봤다. 정말 별생각 없이. 마치 스마트폰 잠금 해제하듯이, 그냥 습관적으로.
손끝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확 퍼져나갔다.
"어어어!"
선생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나도 놀랐다. 이게 뭐지. 방금 내가 한 게 뭐지. 검은 안개는 곧 형태를 갖추며 손바닥 위에 작은 까마귀 모양으로 응축됐다. 깃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진짜 새처럼. 나는 그걸 멍하니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거 되네."
되긴 되는데, 뭐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도 안 하고 최종 보스 스킬을 뽑은 느낌이었다.
선생이 다가와 내 손을 붙잡고 물었다.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학생, 지금 무영술을 쓴 겁니까? 이건 상위 계열인데."
"저도 몰라요. 그냥 됐어요."
"그냥... 됐다고요?"
"네. 그냥요."
선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표정이 바뀌는 속도가 신호등 같았다. 무영술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나중에야 그게 십이대가 본가에서도 극히 드물게 나오는 계열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마치 로또 1등이랑 2등 사이에 있는 뭐 그런 확률 같은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뭘 어떻게 한 건지도 모른 채 최상급 재능을 각성한 셈이었다.
와.
전생에 뭐 하나 특출난 게 없던 인생이었다. 학창시절엔 반에서 중간, 회사에서도 딱히 눈에 띄는 사원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몸으로 넘어와서 뜬금없이 천재라는 소리를 듣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억울함 하나로 인생 역전이라니, 이게 웹소설 클리셰지 싶다가도 내가 그 클리셰 속에 있다는 게 새삼 낯설었다.
하지만 소문에 짓눌린 명예가 하루아침에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학당 아이들은 내 영술 재능에는 감탄하면서도, 정작 나와 눈을 마주치면 슬쩍 피했다. 재능은 재능이고, 소문은 소문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나는 회사 다니면서도 뼈저리게 배운 사실이었다. 실적으로 인정받아도 뒷담화는 계속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서재에 있는 부친에게 오늘 일을 말했다. 강도윤은 처음엔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히고, 무슨 애가 헛소리를 하나 싶은 눈빛이었다. 그러다 내가 손끝에서 다시 그 검은 안개를 피워 보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이게... 정말 네가 한 것이냐."
"네."
"다시 해보아라."
나는 다시 손끝에 감정을 밀어 넣었다. 이번엔 조금 더 익숙하게, 검은 안개가 퍼지고 까마귀 형상이 맺혔다. 부친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시선이 내 손과 내 얼굴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다.
그러다 낮게,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어미도... 젊었을 때 이런 재능이 있었다."
그 한마디에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촛불 하나가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아직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지금 그 얘기를 꺼내면 오늘 얻은 이 이상한 성취감마저 다 씻겨나갈 것 같았다. 다만 그의 눈빛에 스치는 복잡한 감정만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움과 원망이 동시에 담긴, 그런 눈빛이었다. 사람이 저런 눈빛을 지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봤다.
부친은 잠시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봤다. 등을 돌린 채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연습해보아라. 본가에 알려지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어떻게 달라지는데요?"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
그 말이 그날 밤 내가 얻은 유일한 위로였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불안의 시작이기도 했다. 본가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부터 부친의 눈빛이 더 짙어졌다는 걸, 나는 분명히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