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약파기? 가문은 지킵니다

2화

혼약자를 처음 본 건 본가 연회장에서였다. 십이대가 중 아홉째 가문의 방계 딸로서 그런 자리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배려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고, 벽에 붙은 화분처럼 얌전히 서 있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회사 야근에 찌들어 살던 몸이 이제는 비단 치마를 입고 연회장 구석에서 숨소리를 죄고 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났지만, 어쨌든 눈치는 봐야 했다. 여기서 눈치 없이 굴면 목이 아니라 가문의 명줄이 날아간다는 걸 지난 두 달간 아주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그런데 저 앞에서 이현우라는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순간, 뭔가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열여섯이라는데 벌써 소영주가의 위세를 두른 얼굴이었다. 걸음걸이부터가 딴 세상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잘생기긴 했다. 콧대며 턱선이며, 판타지 소설 표지에 박아 넣어도 손해 안 볼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잘생긴 얼굴로 지금 나를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시선이 나를 뚫고 뒤쪽 벽지 무늬를 감상하는 것처럼. "오늘부로 강서연 양과의 혼약을 파기하겠습니다."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와.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들으신 대로입니다. 정절도 지키지 못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순 없으니까요." 정절. 그 단어가 나오는 순간 나는 진심으로 어리둥절했다. 이 몸으로 산 지 겨우 두 달이었다. 두 달. 강아지 한 마리 입양해서 이름 짓기도 애매한 시간인데, 그 짧은 기간에 정절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할 틈이 어디 있었단 말인가. 밥 먹고, 걷는 법 익히고, 이 집안 사람들 이름 외우느라 바빴는데. 억울함보다 먼저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던 여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공자님, 그만하세요. 서연 아가씨도 다 사정이 있으셨을 텐데요." 서은채. 나중에 알게 된 이름이었다. 나는 그때 알지도 못했던 그 이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서려 있었는데, 눈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훔쳐낼 눈물이 애초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 순간 나는 두 사람의 눈빛만으로 사태를 파악했다. 이건 대본이 있는 연극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본을 받아본 적도 없는 유일한 배우였다. "사정이라니, 무슨 사정을 말씀하시는 거죠?" 내가 묻자 이현우는 비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모친의 행실을 닮았다는 소문이야 이미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모친. 십이 년 전 사용인과 도주했다는 그 여자. 나는 만나본 적도 없는 그 여자의 죗값을 지금 여기서 대신 치르는 중이었다. 부모 잘못 골라 태어난 죄, 라는 게 이 세계에서는 진짜 죄목으로 취급된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연회장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혀를 찼고, 누군가는 노골적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마치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라온 흠집 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이었다. 상태 안 좋음, 직거래 비추천, 그런 눈. "제가 그 여자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핏줄은 못 속입니다, 아가씨." 서은채가 다시 끼어들며 말했다. "공자님, 이제 그만하시죠. 여기서 더 이러시면 서연 아가씨가 곤란해지실 텐데요." 곤란해지실 텐데요, 라니. 이미 사람 인생을 통째로 곤란하게 만든 다음에 하는 말이 그거였다. 나는 이 인간들의 화법에 진지하게 감탄했다. 배려하는 척하며 칼을 꽂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이런 화법 구사하는 상사 밑에서 삼 년 버틴 경력이 있는데, 그 상사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제 입장은 누가 대변해 주시나요?" 내가 겨우 그 말을 뱉었을 때, 이현우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대화 상대로 취급조차 안 한다는 뜻이었다. 서은채는 그의 옷깃을 살짝 붙잡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는데, 그 얼굴이 어찌나 완벽하게 슬퍼 보이던지 정말로 무대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조명만 있으면 완벽했을 텐데. 결국 나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연회장을 나왔다. 등 뒤로 낮은 웃음소리와 수군거림이 따라붙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그게 슬퍼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마 둘 다였을 거다. 다음 날부터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강서연은 정절 관념이 느슨한 여인이며 모친과 똑같이 문란하다는, 근거도 없이 몸집만 부풀어가는 소문이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소문에 살이 붙었다. 누구는 내가 밤마다 몰래 담을 넘었다고 했고, 누구는 사용인과 눈이 맞았다고 했다. 정작 나는 이 몸에 들어온 이후로 담 근처엔 가본 적도 없었는데. 소문이란 게 이렇게 창작 의욕을 자극하는 물건인 줄 처음 알았다. 부친 강도윤은 그 소문이 퍼진 첫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재에 홀로 앉아 있는 그의 등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이 가문이 얼마나 얇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지 실감했다. 방계라는 위치, 모친의 오명, 그리고 이제 딸의 오명까지. 삼중으로 쌓인 짐을 아버지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그 등이 어찌나 작아 보였는지, 나는 문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들어가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지은 죄도 아닌데. 나흘 뒤, 본가에서 서신이 왔다. 학당의 다른 학생들 앞에서 낭독된 서신에는 강씨 가문의 신용을 재고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낭독하는 관리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또렷하고 지나치게 담담해서,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잔인하게 들렸다. 신용을 재고한다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신용등급 강등 통보였다. 카드 한도가 확 깎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계좌를 동결시키겠다는 소리였다. 학당 안이 조용해졌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그 시선들 속에 동정은 없었다. 흥미와 경멸, 그 두 가지뿐이었다. 나는 등을 곧게 펴고 앉아 그 시선들을 다 받아냈다. 표정을 무너뜨리면 진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 서신을 읽으며 생각했다. 회사에서 잘리는 것보다 이게 더 지독하다고. 적어도 회사는 소문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았는데. 여긴 소문 하나로 가문 전체를 매장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근거도, 증거도 필요 없이, 그저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는 몇 마디 말로. 그날 밤,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처음으로 진짜 울었다. 억울해서였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두 달의 대가가 이거였다.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이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면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나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죄와 내가 짓지도 않은 죄를 평생 뒤집어쓰고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나는 문득 이현우의 그 비릿한 웃음을 떠올렸다. 저 웃음, 반드시 다시 볼 일이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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