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근 중에 죽는 인간이 나 하나뿐이겠느냐마는, 하필 그날 회식 2차까지 끌려갔다가 막차를 놓쳐서 편의점 앞에서 택시를 잡던 중이었다는 게 좀 억울했다. 삼각김밥 하나 사 먹을까 고민하던 그 순간에,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온 트럭 헤드라이트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브레이크 소리도 없었다. 그냥 빛이었다. 그 빛 속에서 내가 떠올린 생각은 내일 오전 보고서 파일을 저장했는지 안 했는지였다.
죽는 순간까지 회사 생각을 하는 인생이라니, 와. 이게 사람 사는 거였나. 마지막 순간에 인생을 되돌아본다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나는 그 흔한 회고조차 못 하고 엑셀 파일 생각만 하다가 갔다.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눈물이 날 새도 없이 그냥 끝났다.
그리고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나무 서까래에 한지를 발라놓은 것 같은 천장, 은은한 향냄새, 비단 이불의 서걱거리는 감촉. 병원이 아니었다. 저승도 아니었다. 저승이라면 이렇게 이불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저승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몸을 일으키려는데 팔이 이상했다. 가늘었다. 헬스장 한 번 안 간 내 팔이 이렇게 가늘었던 적이 없는데. 손가락도 가늘었다. 손톱은 연분홍색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손목에는 은으로 만든 얇은 팔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잠시 내 손을 들여다보다가, 그것이 명백히 여자의 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정확히 오 초가 걸렸다.
그럴 리가.
혹시 몰라 이불을 걷고 내 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확인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명백했다. 이건 내 몸이 아니었다. 서른두 살 남자였던 내 몸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몸이었다.
곧바로 근처에 놓인 청동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거울 속에는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열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눈매가 서늘하고 콧대가 오뚝한, 미인이라 부를 만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게 나였다. 지금부터 내가 이 얼굴로 살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거울을 든 손이 떨렸다. 소녀도 손을 떨었다. 당연했다. 같은 손이니까. 나는 거울 속 얼굴을 향해 입을 벌려봤다. 소녀도 입을 벌렸다. 손도 흔들어봤다. 소녀도 손을 흔들었다. 진짜였다. 이게 지금 나였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몸종처럼 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겼다. 몸이 낯설어서 그런지 반사 신경마저 어색했다. 여인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곧 눈물까지 글썽였다.
"닷새를 앓으셨습니다, 서연 아가씨. 나리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아십니까. 밤새 잠도 못 이루셨어요."
닷새. 닷새나 이 몸으로 앓아누워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동안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내가 원래 주인인 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서연. 강서연. 그게 이 몸의 이름이라는 걸 알아낸 순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어디가 아팠던 거지?"
"영기 발열이라 하셨습니다. 요즘 아가씨들 사이에 흔한 병이라고요. 봄철에 특히 많이 앓으신다던데, 아가씨는 유독 심하셨습니다."
영기 발열. 요즘 아가씨들. 나는 그 단어들을 곱씹으며 슬며시 창밖을 내다봤다. 기와지붕이 겹겹이 늘어선 풍경, 하늘을 나는 새 대신 어딘가 은빛으로 빛나는 나비 같은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조선도 아니고 대한민국도 아니었다. 뭔가 조선을 본떠 만든, 그런데 마법 같은 게 존재하는 세계.
이건 뭐지.
내가 아는 세계 지식을 총동원해봐도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사극에서 본 기와지붕은 맞는데 저 나비는 뭔데. 저게 그냥 나비면 나비지 왜 은빛으로 빛나는데. 판타지 소설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인데 여긴 조선 느낌이 나는 이 조합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익숙했다. 그러니까, 내가 퇴근길에 웹소설 좀 읽었던 그런 세계관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몸종이 나가고 혼자 남았을 때, 나는 방 한구석에 놓인 서안 위 서첩을 뒤적였다. 종이는 얇고 결이 있었으며 먹으로 쓴 글씨는 단정했다. 거기엔 낯선 필체로 이런 문장이 있었다. "이현우 공자님과의 혼약, 내년 봄으로 정해짐." 이현우.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미 나와 혼인이 정해져 있는 남자라는 소리였다.
와.
죽어서 여자가 됐다는 사실도 소화가 덜 됐는데,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결혼까지 예정돼 있다니. 이건 뭐, 이세계 전생물 클리셰 종합 세트 아닌가. 여기서 갑자기 능력이라도 각성해서 회귀자나 헌터라도 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냥 조용히 살고만 싶은데.
나는 서첩을 덮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진짜 야근보다 더 지치는 일이네."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몸종이 다시 들어오며 말했다.
"아가씨, 나리께서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눈가에 깊은 그늘이 진, 그러나 다정한 눈빛의 남자였다. 걸음걸이에서부터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마치 다친 새를 보러 오는 사람 같았다.
강도윤. 이 순간 나는 아직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가 나를 보는 눈빛만으로도 이 사람이 앞으로 내가 기댈 유일한 어른이라는 걸 직감했다. 눈빛이라는 게 이렇게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는 걸 서른두 해 살면서 처음 느꼈다.
"서연아. 괜찮으냐."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닷새 동안 얼마나 애가 탔는지가 그 짧은 한마디에 다 담겨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도, 얼굴도, 이름도 전부 낯선데 그 한마디에 담긴 진심만은 낯설지 않았다. 그게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그는 내 이불깃을 다시 여며주며 말을 이었다.
"의녀 말로는 이제 열도 다 내렸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며칠은 더 몸조리를 해야 할 것이야.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라."
먹고 싶은 것.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먹고 싶은 건 편의점 삼각김밥이었지만 그런 게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냥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강도윤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짚었다. 손이 따뜻했다.
"열이 다 내렸구나. 다행이다."
그 한마디에 담긴 안도감이 너무 커서, 나는 순간 이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이 아니라는 걸, 이 몸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트럭에 치여 죽었는데 눈 떠보니 이 세계 이 몸이었다고? 정신병자 소리 듣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강도윤은 한참을 더 머물다가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살아났으니 살아야 한다고. 죽음의 순간까지 회사 걱정을 하던 인생에서, 이제는 낯선 이름과 낯선 몸으로, 낯선 세계에서 다시 살아야 했다. 다만 이 세계가 나를 어떤 식으로 굴려먹을지는, 아직 전혀 알지 못했다.
창밖의 은빛 나비들이 밤이 되어도 여전히 떠다니고 있었다. 저것들이 그냥 나비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존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이름도, 얼굴도, 사람들도, 이 세계의 규칙도.
내년 봄에 결혼한다던 이현우라는 남자도, 아직 얼굴조차 본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