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생을 숨긴 집사

5화

나는 한도현과 견습 영애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이 내 어깨 근처에서 멈췄다. "……뭐야, 넌." 한도현의 눈에 짜증이 가득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동자는 술을 몇 잔 걸친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숨결에서도 은은한 술 냄새가 났다. "바닥에 뜨거운 찻물이 튀었습니다. 제가 먼저 치우겠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깨진 도자기 조각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일부러 만든 상황이었다. 그의 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시선을 나에게 돌리기 위해. 손끝에 뜨거운 찻물이 스쳤다. 따가웠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치우는 건 저 계집애가 해야지." 한도현이 발끈했다. "저 아이는 옷이 더러워져서 지금 움직이기 불편할 겁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하며 조각을 계속 주웠다. "제가 대신하는 게 더 빠릅니다." 한도현이 나를 노려보았다. 짜증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얼굴이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몇몇 이들이 숨을 죽였다. 누구도 나서서 말리려 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왕족의 손님인 도련님에게 대드는 건 그 자체로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발을 들어 내 손 근처를 걷어차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도현 공자." 이서린이었다. 어느새 다가와 있던 그녀가 한도현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표정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차가운 겨울 호수 같았다. 바람에 그녀의 은발이 살짝 흔들렸다. "오늘은 지헌 왕자님의 생일 자리입니다. 왕자님의 손님을 이렇게 대하시는 게, 왕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주먹을 쥔 손이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이서린, 넌 곧 내 사람이 될 텐데 이렇게 나서도 되나." "아직 정식으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서린이 냉랭하게 답했다. "그리고 설령 결정된다 해도, 제 사람이 아니라 가온 백작가의 영애입니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렸다. 몇몇 어른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채를 든 부인들이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한도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흥, 마음대로 해." 그가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주변 견습 영애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견습 영애도, 그제야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 소란은 이미 조용한 파문을 만든 뒤였다. "이서린 아가씨의 집사가 제법이라던데." "공자님 성질을 저렇게 받아넘기다니." "저 정도 담이면, 어느 가문에서든 눈독을 들이겠어." 작은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시선들 사이로, 낯선 눈빛 하나가 유독 오래 나에게 머물렀다. 지헌 왕자였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 금빛 눈동자. 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느새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조용히 다가왔다.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방금 그건, 상당히 재빠른 판단이었네."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견습 집사가 저런 위기 상황에서 저렇게 침착하게 대응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의 시선이 내 손끝을 스쳤다. 찻물에 데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과분한 말씀입니다, 왕자님." 나는 고개를 숙였다. 지헌 왕자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뭐지." "이안입니다." "이안." 그가 조용히 되뇌었다. "기억해두지."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자리를 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이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 짙은 청록색 눈동자에, 아주 잠깐, 무언가 흔들리는 기색이 스쳤다. '괜찮으신 걸까.'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지만, 뭔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정확히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과회는 그 뒤로 별다른 소란 없이 마무리되었다. 지헌 왕자는 여러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옮겨 다녔고, 한도현은 끝내 다시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견습 영애들 몇몇이 나에게 다가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만 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과회가 끝나고 마차에 오르는 길, 이서린이 낮게 말했다. "이안." "네, 아가씨." "아까 손, 떨고 있었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찻잔이 흔들리던 그 순간, 내 감정이 요동치던 그 순간을, 정확히 짚어냈다. '언제부터 눈치채신 거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혹시 그전에도 있었던 일들을, 조금씩 의심하고 있었던 걸까. 찻잔이 흔들리는 것 정도야 착각이라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니."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덧붙였다. "묻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무슨 힘인지." 마차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바퀴가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작은 흔들림이 몸을 스쳤다. 나는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데인 자국이 여전히 붉게 남아 있었다. 그 위로, 옷자락 사이에 감춰진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힘을 들키면 안 된다는 걸, 지금까지 수도 없이 되새겨왔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한 걸음 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마차가 저녁 어둠 속으로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나를 향해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만이, 조용히 가슴 한구석에 남았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아니,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수많은 물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서린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흔들리는 마차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질문이, 오늘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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