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다온 왕국은 신분이 곧 목숨값인 나라였다.
왕가 아래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고, 그 아래 평민과 노예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 이름조차 필요 없는 자리에 고아가 있었다.
나는 그 밑바닥에서 태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번 태어났다.
전생의 나는 강윤재였다. 스물다섯, 서울 어딘가의 작은 회사에서 야근에 찌들어 살던 회사원이었다.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지하철에 몸을 싣고, 밤 열한 시에나 겨우 집에 들어가던 삶.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온 왕국 변두리의 어느 뒷골목에서 갓 여덟 살배기 몸으로 굶주리고 있었다.
처음엔 미쳤다고 생각했다. 손을 들어보면 낯선 작은 손이었고, 웅덩이에 비친 얼굴은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 인정했다. 이건 현실이었다. 배가 아프도록 고픈 것도, 발바닥이 갈라지도록 시린 것도, 전부 진짜였다.
그렇게 사 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열두 살이고, 가온 백작가의 견습 집사다.
"이안."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서린이었다.
백작가의 하나뿐인 영애. 올해로 열 살. 은빛에 가까운 금발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눈동자는 짙은 청록색이었고, 표정은 언제나 물처럼 평평했다. 목소리에도 억양이 거의 없어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종종 그녀가 화가 났는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사 년을 곁에서 지내다 보니, 그녀의 미세한 손끝 움직임이나 눈꺼풀이 내려가는 속도만으로도 기분을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장부 계산이 이상해."
그녀가 손끝으로 종이 뭉치를 가리켰다. 영지 농장의 이번 계절 수확 예상치였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 훑었다. 잉크 냄새가 아직 채 마르지 않아 손끝에 살짝 묻어났다.
전생에서 다뤄본 숫자와는 단위도 방식도 달랐지만, 셈이라는 원리 자체는 똑같았다. 사 년 전,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는 남들보다 빠르게 숫자를 읽었고, 남들이 놓치는 것들을 짚어냈다. 그때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재주였는데, 지금은 이서린 곁에 남기 위한 이유가 되었다.
"여기, 세금 공제 비율이 잘못 적용됐습니다. 재작년 기준으로 계산되어 있네요."
"……알고 있었어."
이서린이 짧게 대답했다.
"네가 얼마나 빨리 찾아내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웃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함부로 웃으면 안 된다는 걸 사 년 동안 배웠다. 웃음을 보이면 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서곤 했다. 마치 웃음이라는 감정 자체를 낯설어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고, 나 역시 그런 그녀 곁에서는 조용히 존재하는 법을 익혔다.
이서린을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그날 나는 뒷골목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사흘을 굶었고, 열이 올라 정신이 흐릿했다. 비가 왔던가, 아니었던가. 그날의 날씨조차 뒤섞여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마차 바퀴 소리와, 나를 내려다보던 작은 눈동자만은 선명했다. 그런 나를 발견한 게 여섯 살배기 이서린이었다. 그녀는 마차 창문 너머로 나를 가만히 보다가, 아버지에게 딱 한마디를 했다고 들었다.
"저 아이, 데려가요."
왜 나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물어본 적도 없다. 어쩌면 답을 듣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동정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는 그저 우연일 테니까.
다만 그날 이후 나는 이름을 받았다. 성도 없이 살던 나에게, 가온 백작가에 입적되며 가문의 성인 '이(李)'를 받아 이안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불러줄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이, 그때는 낯설고 무서웠다.
그날부터 나는 그녀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람으로 살았다.
"박덕수 집사님이 오늘 아침 왕도에서 온 서신을 받으셨더군요."
뒤에서 다가온 하녀장이 조용히 알려왔다. 목소리를 낮춘 채, 주변을 살피는 눈치였다.
서신. 왕도.
요즘 왕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은 이미 저택 하인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었다. 다온 왕국의 최대 세력인 한씨 공작가가 최근 여러 백작가에 사람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조용히, 은밀하게. 어느 하인은 그것을 두고 "곧 뭔가 큰 게 벌어질 거"라고 수군거렸고, 또 다른 하인은 그저 헛소문일 거라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백작가에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마치 폭풍이 오기 직전, 공기가 미묘하게 무거워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서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유난히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아챘다. 평소라면 서류 정리는 순식간에 끝내는 그녀였다. 오늘은 같은 종이를 두 번, 세 번씩 다시 매만지고 있었다.
"아가씨."
"……왕도 이야기, 나도 들었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선은 여전히 종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버지 표정이 며칠 전부터 좋지 않아."
나는 그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위로할 말을 찾기엔 나 역시 아는 게 없었고, 괜한 말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별일 없을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실없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이서린은 잠시 나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래."
그뿐이었다.
그날 오후, 박덕수가 나를 따로 불렀다.
집사실 문 앞에 서자,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백작님과 무언가를 상의하는 듣했다. 나는 문을 두드리기 전, 잠시 숨을 골랐다.
"이안."
문이 열리고, 박덕수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저녁에 백작님 서재로 오너라. 너도 알아야 할 이야기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녁에 듣게 될 거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 짧은 순간, 그의 눈빛에서 평소와는 다른 긴장을 읽었다. 지금까지 사 년을 지켜본 박덕수는 좀처럼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밤, 내가 알게 될 이야기가 앞으로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거라는 사실만은, 이상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저택의 그림자가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