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박덕수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천장을 보며 서린 아가씨의 얼굴을 떠올리고, 한씨 공작가의 문장을 떠올리고, 박덕수의 흔들리던 눈빛을 떠올렸다. 그리고 새벽이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다. 견습 집사복은 언제나처럼 목까지 단정하게 잠겨 있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자 박덕수의 등이 먼저 보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회백색 머리카락, 굽은 등, 언제나 웃음기가 걸려 있는 눈매. 사 년 동안 나에게 집사의 모든 것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식기 정리하는 법, 손님을 맞이하는 순서, 백작가 사람들의 성정을 파악하는 법. 그 모든 걸 이 좁은 방에서 배웠다.
동시에, 내 양아버지였다.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서류 뭉치가 늘어서 있었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얇게 들어와 그의 손등에 걸렸다.
나는 그 앞에 섰다.
"어젯밤 표정이 이상하셨습니다."
돌려 말하지 않았다. 돌려 말할 여유가 없었다.
박덕수의 손이 잠시 멈췄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춘 채로, 잉크가 조금씩 번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
"혼약 얘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던 거죠."
그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시계추 소리만 방 안을 채웠다. 째깍, 째깍. 나는 그 소리를 세면서 기다렸다.
"……그래."
그가 마침내 인정했다.
"한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순간 방 안의 유리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지지직.
책상 위의 잉크병이 살짝 흔들리며 물결을 만들었다.
나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한 달이나요."
"이안."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까."
목소리가 예상보다 크게 나왔다. 나조차 놀랐다.
"이건 백작가의 일이다. 집사가 나서서 판을 흔들 문제가 아니야."
"그럼 저는요."
내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저는 집사가 아니라 그냥 도구입니까."
방 안의 촛대가 쓰러졌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갓이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바닥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박덕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표정에는 놀람도, 분노도 없었다. 대신 오래된 슬픔 같은 것이 스쳤다.
그 슬픔이 무엇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사 년 전 그날, 내가 처음 이 저택 문턱을 넘었을 때도 그는 저런 눈으로 나를 봤다.
"이안, 앉아라."
나는 앉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앉으면 뭔가 무너질 것 같았다.
"한씨 공작가는 최근 왕국 내 여러 백작가와 손을 잡으려 움직이고 있다. 목적은 왕위 계승 구도의 재편이지. 서린 아가씨는 그 판에서 아주 유용한 패다."
"그러니까요."
"백작님도, 나도 그걸 안다."
박덕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우리가 함부로 반대하면, 서린 아가씨는 물론이고 이 저택 전체가 위험해진다. 정치라는 건 그런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치. 그 단어가 이상하게 낯설고도 익숙했다.
그 순간, 전생의 기억 하나가 스쳤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 아니, 전생의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 나는 늘 어른들의 세계는 복잡하다고만 생각했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힘없는 사람은 항상 침묵을 강요당했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계약서의 불공정한 조항에도, 나는 늘 입을 다물었다. 그게 사는 방법이라고 배웠다. 그렇게 침묵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로 삶을 끝냈다.
나 역시 그 침묵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이번 생에서도 같은 침묵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
'이번에는 아니야.'
'적어도 이번에는,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을 지켜볼 거야.'
"저는 이서린 아가씨를 지킬 겁니다."
나는 박덕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공작가의 뜻대로 흘러가더라도, 아가씨가 위험해지는 순간엔 제가 막을 겁니다."
"어떻게."
박덕수가 물었다.
"넌 아직 견습 집사일 뿐이다. 힘도, 권한도 없어."
"그럼 그 힘과 권한을 만들면 됩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집사라는 신분 자체를 이용하겠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안에서는, 절대 아가씨를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박덕수가 오래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창밖의 빛을 받아 조금 흐려 보였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그 눈빛, 사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구나."
"그때도 죽어가면서 그런 눈으로 날 쳐다봤지. 살고 싶다고, 살아서 반드시 뭔가를 이루겠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서진 촛대의 유리 조각을 조용히 주워 담았다.
손끝에 유리 파편이 스칠 뻔했다. 박덕수가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안."
박덕수가 낮게 불렀다.
"네가 지금 무엇을 마음에 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건 알아둬라. 그 힘,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튀어나오는 그 힘 말이다."
나는 굳었다.
손에 쥐고 있던 유리 조각이 미끄러질 뻔했다.
"공작가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드러내지 마라. 알려지는 순간, 넌 도구가 아니라 위험물로 분류된다."
그 말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위험물. 그 단어가 유독 무겁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녀 하나가 급히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유난히 급했다. 문틈으로 하녀의 숨찬 얼굴이 보였다.
"박덕수 집사님, 지헌 왕자님 궁에서 초청장이 도착했습니다."
박덕수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오갔던 무거운 대화가 순식간에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왕자님의 열 살 생일 다과회에, 서린 아가씨를 초청한다는 내용입니다."
하녀가 덧붙였다. 숨을 고르며, 그녀는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봉투였다.
"그리고, 한도현 공자님도 함께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유리 조각이 다시 한번 서늘하게 반짝였다.
박덕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 봉투를 바라보며, 방금 다짐했던 말들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지켜야 한다.
그것도 아주 빨리,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