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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며칠 뒤, 이현우가 다시 공작저를 찾았을 때 서아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창밖으로 그의 마차가 저택 정문을 통과하는 것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검은 마차의 문양이 가까워질수록 서아는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난 연회에서의 그 장면— 그의 팔이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주변의 시선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했던 그 순간— 을 서아는 며칠 동안 몇 번이고 되짚어 보았고, 그 결과 오늘은 도망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시녀가 대접실 문을 열자, 겨울 공기 특유의 차가운 냄새와 함께 이현우가 들어섰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절제되어 있었지만, 서아는 그 안에서 미묘하게 다른 온도를 느꼈다. 마치 그도 오늘의 대화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짐작하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이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불편했소." 그것은 사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완전한 사과는 아니었는데, 서아는 그 애매한 형태의 문장 속에서 그가 정말로 후회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상황을 정리하려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으며, 그 건조함이 오히려 서아의 마음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은 늘 이런 식이구나. 절반만 말하고 절반은 나에게 채우라고 한다.' 서아는 잠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짙은 색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 서아 자신도 정확히 이름 붙이기 힘든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예상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그 순간 저를 지킨 것입니까, 아니면 소유하려 하신 것입니까." 그 질문은 이현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다정함이나 배려로 해석하고 감사히 여겼는데, 이 소녀는 그 이면의 감정을 정확히 구분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현우는 순간 말문이 막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안에서는 즉각적으로 반박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 질문의 날카로움에 자신도 모르게 흔들리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겉으로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손가락 끝이 무의식중에 의자의 팔걸이를 살짝 움켜쥐었다가 풀리는 것을, 서아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건." 그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뒤이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문장이 끊겼다. 대접실 안에는 잠시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만이 남았다. 타닥, 하고 불씨가 튀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서아는 그 침묵을 채근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는데, 그 기다림의 태도가 오히려 이현우를 더 궁지로 몰아넣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서두르지 않는 눈빛, 그것이 지금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의였다. '이 사람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있구나.' 서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이 순간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그를 몰아붙일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두려워했던 감정 앞에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그 근원을 캐묻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만족스러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시선 한 번에 심장이 얼어붙던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쪽이 되어 있었다. 이현우는 오랜 침묵 끝에, 평소와는 다르게 시선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모르겠소." 그것은 이현우가 처음으로 내보인 확신 없는 대답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모든 감정과 판단에 흔들림이 없다고 여겨왔는데, 이 소녀 앞에서는 그 확신이 손끝에서부터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전장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려온 사람이었고, 그 결정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모르겠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겨우 열몇 살의 소녀 앞에서 그 단단하던 방벽이 조용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서아는 그 대답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스스로의 감정을 포장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짧은 세 글자의 대답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자신 있게 "지켰다"고 대답했다면, 서아는 오히려 그 말을 믿지 못했을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이미 별당의 어머니를 통해 배운 뒤였으니까. "저는." 서아가 말을 이으려다 멈추자, 이현우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그 눈빛에는 조급함이 없었지만,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 특유의 팽팽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그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지도 뒤로 물리지도 않은 채, 그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는 손끝으로 치맛자락의 끝을 가만히 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서아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그 밤과 별당에 격리된 어머니의 존재를 이 자리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말속에 담긴 진심만은 전해지길 바랐다. 어머니의 웃음이 언제부턴가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 웃음을 앗아간 것이 바로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서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워왔다. 그러니 그 단어 앞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이현우는 그 대답을 곱씹으며, 처음으로 자신이 이 혼약을 얼마나 단순하게 생각해 왔는지 깨닫는 것 같았다. 그는 서아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어왔지만, 그 진심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스스로도 설명할 자신이 없어졌다. 지금까지 그에게 감정이란 명확한 명령처럼 다가오는 것이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소유해야 할 것을 소유하는 것. 그런데 서아는 그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그 구분 앞에서 그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방식 전체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창밖으로 저녁 해가 기울며, 대접실 안의 빛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붉은빛이 벽을 타고 스러지는 것을 서아는 눈으로 좇았고, 이현우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대접실을 나서기 전, 이현우가 마지막으로 낮게 말했다. "천천히 알아가도 좋소." 그 말이 서아에게는 처음으로, 명령이 아닌 청유처럼 들렸다. 그녀는 그 말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아버지의 그 밤이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이현우가 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아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불확실함이, 지금까지 느껴온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함께 데려오고 있다는 것을.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아는 그 자리에 한동안 가만히 앉아, 방금 나눈 대화의 조각들을 다시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천천히 알아가도 좋소.' 그 한마디가 왜 이렇게 오래도록 귓가에 남는 것인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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