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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가을이 끝나갈 무렵의 공작저는 유난히 조용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강서아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는 매년 이 계절이 되면 저택 전체가 숨을 죽이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그 이유를 정확히 물어본 적은 없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는 시기, 하녀들이 유독 발끝으로 걷고 시종들이 목소리를 낮추는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저택의 어른들은 누구도 그 침묵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일도 아니고 아버지의 생일도 아닌, 아무 날도 아닌 그날 밤에 유독 하녀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다닌다는 것을 눈치챈 건 최근의 일이었다. 올해로 세 번째던가, 네 번째던가. 서아는 정확히 셈해보지 않았지만, 그 이상한 정적이 매해 이 무렵 어김없이 저택을 덮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서아는 서재 앞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췄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불빛이 아니라 냄새였는데, 독한 술 냄새와 함께 종이 태우는 듯한 매캐한 향이 섞여 있어서 그녀는 반사적으로 코를 감쌌다. 평소라면 그 앞을 지나칠 때 새어나오던 것은 서류를 넘기는 마른 소리나 인장을 찍는 짧은 두드림 정도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공기 자체가 무거워서, 마치 그 문 너머에 다른 계절이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안에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 강도윤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시종이 실수로 흘린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세 번째 흐느낌이 들려왔을 때, 서아는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른다섯의 나이에도 늘 정무관답게 단정하던 그 사람이, 문틈 너머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무너져 있었다. '아버지가 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서아는 그 생각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문에 손을 얹었다가, 손끝이 나무의 냉기에 닿는 순간 멈춰 섰다. 겨울을 앞둔 저녁의 공기는 벌써부터 살갗을 파고드는 서늘함을 품고 있었는데, 문의 표면은 그보다도 차가웠다. 마치 그 안에 있는 시간이 바깥과는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 같아서,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침범하는 기분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그냥 지나쳐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고, 그 어정쩡한 자세로 몇 분을 서 있는 사이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서아는 얼른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늦어서,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손끝은 여전히 문틀에 닿아 있었다. 강도윤은 딸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책상 앞에 다시 앉았을 뿐이었다. 그 뒷모습이 어딘가 허락처럼 느껴져서, 서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 안은 평소와 달리 등불이 반쪽밖에 켜져 있지 않았고, 그 어스름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실제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책상 위에는 낡은 편지 뭉치가 흩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색이 바랜 초상화 한 장이 뒤집힌 채 놓여 있어서, 서아는 그것이 무엇의 그림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지지의 가장자리는 누렇게 삭아 있었고, 몇 장은 접힌 자국을 따라 찢어질 듯 약해져 있어서, 얼마나 오랫동안 펴고 접고를 반복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들어와서 앉으시오." 아버지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가 달랐다. 늘 명령형으로 끝나던 그 어조가 오늘만은 부탁처럼 들렸는데, 서아는 그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잠시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아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으며, 이 사람이 이렇게 작아 보인 적이 있었나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낯설어서 오히려 등이 곧게 펴지는 것 같았다. 늘 서아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존재였던 아버지가, 지금은 술잔을 쥔 손끝조차 미세하게 떨리는 사람으로 보였다. 강도윤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초상화를 다시 뒤집어 보여주었다. 젊고 소박한 얼굴의 여인이 그려져 있었고, 그 눈매가 어딘가 서아 자신과 닮아 있어서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화려한 장신구도 없고 값비싼 옷도 아닌, 그저 수수한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옅게 웃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그 웃음이 어딘가 서아가 거울 속에서 본 적 있는 표정과 겹쳐졌다. "네 어머니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서아는 한소연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서류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평민 출신으로 남작가의 서녀가 되었고, 아버지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으며, 지금은 영지 별당에 격리되어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는 그 여자. 서아는 그동안 그 존재를 마치 옛이야기 속 인물처럼, 실감 없는 이름 하나로만 알고 지내왔다. "열정이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건지 몰랐다." 강도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술잔을 비웠고, 서아는 그 말이 후회인지 미련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원망도 없고 그리움만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그리움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책처럼 들리기도 했다. 온성 후작가의 딸과 정해져 있던 혼약을 깨고, 나라를 뒤흔들 스캔들을 일으키며 얻은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은 결국 한 여자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고 남자를 이런 밤마다 술잔 앞에 앉히는 것으로 끝나고 있었다. 서아는 그 이야기의 세부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사교계에서 흘러나오는 단편적인 소문들을 조합하면 대략의 그림은 그려졌다. 파혼, 스캔들, 그리고 그 끝에 남은 것은 별당에 갇힌 여인과 매년 이 무렵 술잔을 붙잡는 남자. "어머니는… 지금도 아프신가요." 서아는 겨우 그 질문을 꺼냈는데, 강도윤은 대답 대신 편지 뭉치를 조심스럽게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마치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는 것처럼 느려서, 서아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서아는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채로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사랑이 저런 모습이라면, 자신에게도 언젠가 닥칠 그 감정이라는 것이 두려워졌고, 동시에 궁금해졌다. 진짜 사랑과 순간의 열병을 구분할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든 사랑이, 결국 남은 사람들을 이렇게 오래도록 아프게 만든다면, 그 시작이 아무리 뜨거웠던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서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는 별이 드문드문 박힌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 차갑고 먼 빛을 바라보며 서아는 문득 자신의 혼약자를 떠올렸다. 왕태자 이현우. 아직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는 그 사람이, 며칠 뒤 처음으로 공작저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서아는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소리 없이 되뇌어 보았지만, 이름에 붙는 얼굴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초상화 몇 장으로 본 것이 전부였고, 그 그림 속 얼굴은 지나치게 단정하게 그려져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사람도 아버지처럼,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일까.' 그 질문에 답을 줄 사람은 아직 없었다. 왕실의 혼약이라는 것이 애초에 감정과는 무관하게 성립되는 것이라고들 했지만, 서아는 그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그저 격식대로 살아갈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결국 그 안에 숨어 있던 열정이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지 않았던가. 서아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왜인지 그 낯선 이름이 자신의 앞날에 무언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울 것 같다는 예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창밖의 별빛은 여전히 멀고 차가웠고, 며칠 뒤 도착할 그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려 할수록 어둠 속에서 아무 형체도 잡히지 않았다. 다만 알 수 없는 무게 하나가 가슴 한켠에 조용히 내려앉는 것 같았고, 그것이 무엇의 예고인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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