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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는 결국 문을 열지 않고 돌아섰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는 순간까지도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문 안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복도를 따라 걸어 집무실로 향했다. 낡은 마룻바닥이 발밑에서 미세하게 울렸다. 집무실 문을 열자 익숙한 잉크 냄새가 코를 스쳤다. 책상 위에는 아침에 두고 나갔던 서류들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서류 뭉치를 끌어당겼다. 숫자는 그대로였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곡물 수확량, 소작료 정산, 이번 달 지출 내역까지. 전부 익숙한 항목들이었는데도 글자가 자꾸 흐트러졌다. 펜을 들었지만 잉크가 마르도록 종이 위에 대지 못했다. '괜찮아. 그냥 잠깐 서 있었던 것뿐이야.' '문을 열었어도 별일 없었을 거야.' 그렇게 되뇌었지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지유가 예고 없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유는 문틀에 몸을 기댄 채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연푸른 원피스 자락이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흔들렸다. "여기가 네 방이야?" 지유가 물었다. 존댓말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순간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짚지 않았다. "아니, 여긴 집무실이야. 내 방은 이 층이고." 내가 대답했다. 지유는 안으로 들어와 서류더미를 훑어보았다. 손끝으로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낡은 인장이 찍힌 소작료 대장이었다. "이거 아버지 서명이 필요한 거 아니야?" 그녀가 물었다. "내가 대리 서명을 하고 있어. 삼 년째." 나는 짧게 대답했다. 지유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뭔가 계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지유는 서류를 내려놓고 책상 위 물건들을 하나씩 만지기 시작했다. 잉크병 뚜껑을 열어보고, 다시 닫았다. 봉인용 인장을 손바닥 위에 올려보고, 무게를 가늠하듯 흔들었다. 그리고 낡은 나침반을 집어 들었다. 황동 테두리가 세월에 닳아 반질거리는 물건이었다. 나침반을 집어 들 때 손이 멈췄다. "이거 내가 잃어버렸던 거잖아." 지유가 말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네가 나한테 준 거야. 10년 전에."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억 안 나." 지유는 그렇게 말하며 나침반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짝!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뭔가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책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꽉 눌렀다. 손톱 밑이 하얘질 정도였다. "돌려줄 수 있어?" 내가 겨우 물었다. "내 거라니까. 왜 자꾸 남 물건에 집착해?" 지유가 되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유는 곧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혼자 남은 나는 빈 책상 자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나침반이 놓여 있던 자리에는 먼지 한 줌만큼의 옅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10년 전, 4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버지는 이미 화실에만 머물렀고, 나는 아홉 살이었다. 저택 안 어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도 다가와 손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정원 구석, 눈매화 나무 아래에 혼자 앉아 있는 게 유일한 일상이었다. 나무 밑동에는 이끼가 두껍게 껴 있었고, 그 위에 앉으면 치맛자락이 축축해졌다. 그래도 그 자리가 좋았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유일한 곳이었으니까. 그날도 나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파묻은 채였다. "거기서 뭐 해?" 누군가 물었다. 고개를 들자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지유였다. 낡은 삼베 치마에 맨발이었다. 그때 지유는 이 저택에 막 들어온 서출 아이였다. 아무도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하녀들도 그녀를 스쳐 지날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안 해." 내가 대답했다. "엄마 죽었다고 다들 그러던데, 진짜야?" 지유가 물었다. 직설적인 질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상처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들 조심스레 피해가던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게 신기했다. "응, 진짜야." "나도 엄마 없어. 여긴 아빠뿐이야." 지유가 말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유는 내 옆에 앉았다. 이끼 때문에 옷이 젖는다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말없이 한참을 함께 있었다. 바람이 눈매화 가지를 흔들었고, 꽃잎 몇 개가 우리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매일 그 나무 아래서 만났다. 지유는 낡은 구슬치기를 가져와 나에게 규칙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부엌에서 몰래 훔친 설탕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나는 그 며칠이 그전까지의 몇 년보다 더 따뜻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지유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고 낡은 나침반이었다. "이거 우리 엄마 거였어. 너 줄게." 지유가 말했다. "이렇게 소중한 걸 왜 나한테 줘?" 내가 물었다. "네가 나 친구 해주니까." 지유가 대답했다. 그때 지유의 눈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따뜻했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밤마다 잠들기 전, 나는 그 나침반을 손에 쥐고 방향을 맞춰보곤 했다. 바늘이 흔들리다 멈추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언젠가 이 나침반으로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하며 웃었던 밤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지유가 나침반을 가져가면서 보인 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같은 물건인데, 같은 손인데,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낯설었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창틀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 책상 위 잉크병에도 그 빛이 반사되어 어른거렸다. 로벨이 저녁 식사를 알리러 왔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오늘은 백작님과 강지유 님이 함께 식사하십니다. 아가씨는 따로 준비해드릴까요." 로벨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섞여 있었지만, 결정은 이미 내려진 것처럼 단정적이었다. 그 질문 안에 담긴 뜻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식탁에 내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로벨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는 손끝으로 방금까지 나침반이 놓여 있던 책상 모서리를 다시 만졌다. 그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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