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집무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서류더미 위에 길게 드리웠다.
먼지 낀 창틀 사이로 비쳐드는 빛은 이미 오후로 접어들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는 소작농 명부를 손끝으로 짚어가며 숫자를 확인했다.
올해 밀 수확량은 작년보다 12퍼센트 줄었고, 청원서는 서른일곱 건이 밀려 있었다.
가뭄 탓이라는 보고가 절반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세율을 낮춰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손등에 살짝 돋은 흰 털이 잉크 자국 위로 스쳤다.
오코조 수인의 특징은 이런 순간에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귀 끝이 조금 접히면 피로하다는 신호였고, 지금 내 귀는 완전히 접혀 있었다.
'세금 감면 신청서 열두 건, 수로 보수 예산 팔백 골드, 창고 재고는 곡식 스물세 가마.'
나는 숫자를 되뇌며 장부를 넘겼다.
펜촉이 종이에 닿을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만이 집무실을 채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런 계산을 한 번도 직접 해본 적이 없었다.
윤태석 백작, 내 아버지는 삼 층 회랑 끝 화실에서 그림만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버지가 그리는 그림은 대개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버지는 영지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삼 년 전, 마차 사고였다고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고, 그래서 실감이 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이 영지의 실질적인 행정은 열아홉 살인 내가 맡고 있었다.
가뭄과 세금, 소작농들의 불만, 창고의 곡식량까지 전부 내 손끝에서 결정되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 일을 맡긴 적은 없었지만, 아무도 대신하려 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로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서신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가씨, 강지유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펜을 쥔 손이 멈췄다.
심장이 갑자기 빨라지는 걸 느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어야 했다.
"언제 온다는 연락이 있었나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게 나왔다는 걸 나 스스로도 알았다.
"어젯밤 늦게 서신이 왔습니다. 백작님께서 직접 마중을 나가라 하셨습니다."
로벨이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춰 섰다.
아버지가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게 낯설었다.
최근 몇 년간 아버지가 무언가를 직접 지시한 적은 거의 없었다.
강지유는 삼 년 전 수도로 떠난 뒤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언제였는지 세어보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삼 년. 서른여섯 달. 아니, 정확히는 삼 년 두 달이다.'
나는 그 숫자를 세는 동안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서류를 서둘러 정리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차가 이미 정원 앞에 서 있었다.
말 두 마리가 땀에 젖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마부는 고삐를 정리하며 짐칸을 살피고 있었다.
은사 자수가 놓인 남청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손목에는 붉은 루비가 박힌 팔찌가 걸려 있었고, 구두는 수도에서만 유통된다는 산호 상표가 박혀 있었다.
키는 나보다 반 뼘 정도 컸고, 머리는 정교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다.
지유였다.
예전보다 화려해졌지만, 눈매만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 눈매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에 그 눈이 나를 보며 웃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유야."
내가 먼저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신경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나를 잠시 훑어보았다.
짐을 나르는 하인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발끝에서 얼굴까지 천천히 오르는 동안,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실례지만, 여기 관리인이신가요."
지유가 물었다.
귀 끝이 완전히 접혔다.
"저... 저예요. 소하예요."
내가 더듬으며 말했다.
지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소하 아가씨요?"
그녀는 잠시 나를 다시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낡은 서랍 속에서 오래된 물건을 찾는 듯한 표정이었다.
"13년 전 헤어졌으니 몰라볼 수밖에요."
지유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온기가 없었다.
나는 그 웃음이 진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세 살이 아니라 열여섯이었어. 나는 열여섯 살이었어, 지유야.'
마음속으로만 정정했을 뿐,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열여섯 살이던 그해 봄, 지유는 눈매화 나무 아래에서 나에게 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 기억이 지금 이 순간과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로벨이 짐을 옮기라고 하인들에게 지시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트렁크 세 개와 가방 두 개가 마차에서 내려졌다.
지유는 나를 지나쳐 저택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며 점점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정원의 눈매화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가지 끝에 매달린 이파리 몇 개가 떨어져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예전에는 저 나무 아래에서 지유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다.
지유가 수도로 떠나기 전날에도 우리는 저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때 지유는 나에게 곧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었다.
지금 그 나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때의 지유는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저택 안에서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삼 년 만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낯설었고, 동시에 서글펐다.
나는 그 소리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와 오라버니의 초상화였다.
아버지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었고, 실물보다 훨씬 온화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었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지유야,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지유가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문이 두꺼워서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멈춰 섰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문고리가 미끈거렸다.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이대로 돌아서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문 안쪽에서 다시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가 마치 나를 향한 문 밖의 세계와, 지유를 향한 문 안쪽의 세계를 완전히 갈라놓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