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번 달 안에 퇴사한다. 그게 요즘 내 유일한 신앙이었다.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에는 디데이 숫자가 매일 하나씩 줄어들었는데, 오늘은 마이너스 이십칠이었다. 마이너스라는 게 이미 지나간 마감을 표시하는 숫자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숫자를 지우지 않고 그냥 옆에 새 숫자를 하나 더 붙였다. 이러다 포스트잇으로 벽지를 바를 판이었다. 누가 보면 대단한 결심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이건 결심이 아니라 자기위안용 부적이었다. 붙여놓기만 하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라는, 그런 근거 없는 믿음.
문제는 이 부적이 삼 개월째 효과가 없다는 거였다.
"이서연 씨, 이거 내일 오전까지 되죠?" 팀장이 노트북을 내 자리에 턱 얹어놓으며 물었는데, 저건 질문이 아니라 통보라는 걸 삼 년째 다니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심지어 저 말투에는 미묘하게 하강조가 붙어 있어서, 반박할 여지를 원천봉쇄하는 기술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저런 걸 어디서 배우나. "네, 해보겠습니다." 나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해보겠습니다가 아니라 죽여버리겠습니다, 라는 문장이 떠올랐다가 조용히 삭제되었다. 그런 상상이라도 해야 숨이 쉬어지는 회사 생활이었다.
팀장이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문서 제목을 다시 확인했다. '3분기 전략보고 초안_최종_진짜최종.hwp'. 파일명에 최종이 두 번 들어가는 것부터가 이미 이 일이 최종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마우스를 클릭했다. 커서가 깜빡였다. 나도 깜빡이고 싶었다. 존재 자체를 깜빡이다가 그냥 꺼져버리고 싶은 그런 기분.
옆자리 대리님이 조용히 텀블러를 건네주며 눈짓을 했다. "힘내요, 서연 씨." 소리 없는 입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텀블러를 받았는데, 그 안에 든 게 커피인지 링거인지 헷갈릴 정도로 진했다. 이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카페인 농도를 혈액보다 높게 유지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결국 그날도 막차를 놓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사무실을 나섰다. 거리는 이미 텅 비었고 가로등 불빛만 축축한 아스팔트 위에 번져 있었는데, 나는 그 불빛을 보면서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퇴근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예전에는 몰랐다.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야근 수당이 붙는다는 사실만으로 뭔가 성취감을 느꼈던 것 같은데, 삼 년이 지나니 그 성취감은 온데간데없고 통장에 찍히는 숫자와 몸이 축나는 속도만 반비례로 늘어갔다. 이게 맞는 삶인가, 나는 걸으면서 몇 번이나 그 질문을 되풀이했지만 답은 늘 같았다. 아니다. 아닌데 계속하고 있다.
계속하고 있는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뭐가 있을까. 월세, 카드값, 이번 달에 나갈 보험료. 그런 현실적인 이유들이 줄줄이 떠올랐지만 그중 어느 것도 내 삶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했다. 그냥 관성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로 내리막길을 굴러가는 자전거 같은 삶.
골목을 돌아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는 편의점 불빛 하나가 유일한 온기였다. 나는 삼각김밥과 캔커피를 사서 그 자리에서 김밥 포장을 뜯었는데, 참치마요 맛이었고 딱히 맛있지도 없지도 않았다. 그냥 연료였다. 사람이 연료를 먹는 기분으로 밥을 먹기 시작하면 그건 정말 위험 신호라던데, 나는 그 위험 신호를 벌써 몇 달째 무시하고 있었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문득 눈에 들어왔는데, 다크서클이 아이라이너처럼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이 정도면 화장할 필요도 없겠다. 나는 그 생각을 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캔커피를 따서 한 입 마셨다. 미지근했다. 편의점 냉장고에 있던 걸 꺼낸 지 얼마 안 됐을 텐데도 이미 식어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내가 뭘 마셔도 다 미지근하게 느껴지는 상태가 된 건지도. 요즘은 그런 감각의 구분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어, 이거 뭐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균형은 무너진 뒤였고, 나는 계단 옆 벽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르 주저앉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크게 뛰는 게 느껴졌는데, 무섭다기보다는 그냥 몸이 무언가를 항의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과로다. 이건 백 퍼센트 과로다, 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상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는데,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아, 이제 좀 쉬어도 되는구나. 몸이 먼저 파업을 선언한 거였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나를 힐끔 쳐다봤지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서울의 밤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취객인가 하고 무시하는 게 오히려 배려일 수도 있는 도시.
의식이 흐릿해지면서 주변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지하철 안내방송, 사람들 발소리, 그런 것들이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뭉개졌다. 나는 그 와중에도 내일 오전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를 떠올렸다. 이 상황에서까지 그 생각이 나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업무 걱정을 하는 인간이라니, 이거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 흐릿함 속에서 뭔가 낯선 기운이 스쳤다. 설명하기 힘든, 마치 몸의 안쪽에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한 감각이었다. 저혈당으로 인한 어지러움과는 결이 달랐다. 그건 마치 몸속에 있던 뭔가가 슬며시 자리를 바꾸는 느낌, 혹은 누군가가 내 안에서 문을 하나 열었다가 닫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게 그냥 저혈당 때문이겠지, 라고 마지막으로 합리화를 해봤지만 그 합리화가 끝나기도 전에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느껴진 건 발밑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였다. 지하철역 바닥이 흙일 리가 없는데.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아스팔트도 형광등도 아닌, 하늘을 가릴 만큼 높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이게 뭐야.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고, 그 사이로 새소리 같은 게 섞여 들렸다. 도시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보았는데,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환각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냄새도, 촉감도, 심지어 볼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까지도.
설마 죽어서 저승 온 건 아니겠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저승에 이렇게 벌레 물릴 것 같은 숲이 있을 리는 없잖아.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나무였다. 어디를 봐도 나무.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의 벽.
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