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당했더니 살 것 같네요

5화

대면은 조사국의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는데, 벽마다 걸린 청현국 왕실의 문장이 차갑게 빛나는 그 공간은 대유국의 화려한 접견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창문 너머로는 겨울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회의실 안을 밝히는 가스등은 유리 갓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며 벽에 걸린 사람들의 그림자를 조금씩 늘였다 줄였다 했다. 백하린은 청현국 조사국의 초청을 받아 국경 사건에 대한 협조 차원에서 방문했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있었으나, 그 명분이 얼마나 얇은 껍데기인지는 회의실에 감도는 긴장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세아는 조사관의 맞은편에 앉았고, 백하린은 그 옆자리에 마치 이 자리의 주인처럼 여유롭게 앉았다. 그 자세 하나만으로도 대유국에서 삼 년을 보낸 세아는 백하린이 지금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언제나 자신이 앉은 자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백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는데, 존댓말과 미소를 완벽하게 갖춘 그 인사는 오히려 그 완벽함 때문에 더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대유국에서의 일은... 서로에게 유감스러운 결과였다고 생각해요." 유감이라는 단어가 세아의 귀에 얼마나 공허하게 울리는지, 백하린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은랑을 빼앗기고, 왕궁 앞뜰에서 모욕당한 채 추방당한 그날의 기억이 세아의 몸을 순식간에 굳혔다. 사람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손가락질을 하고, 흙바닥에 무릎이 꺾인 채 끌려 나가던 그 오후의 햇빛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는데, 그때 백하린은 계단 위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동정도, 미안함도 없는 얼굴로.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굳음을 감출 수 있을 만큼은 단단해져 있었다. 세 해 동안 갈고닦은 것이 바로 그 위장술이었다. "유감이라니, 정확히 어떤 부분이 유감이신가요." 세아가 되물었다. 그 반문에 회의실 안 조사관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는데, 백하린의 표정에는 미세한 균열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떠나게 된 것 말이에요. 저는 늘 당신을 동생처럼 여겼는데요." 그 말이 얼마나 거짓인지, 세아는 대유국에서 보낸 세 해의 기억 하나하나를 증거로 댈 수 있었다. 백하린이 자신을 동생처럼 여긴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위험한 임무를 떠넘길 때뿐이었다. 눈이 내리는 국경 초소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게 했던 것도,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대신 뒤집어쓰게 했던 것도 전부 그 동생 같은 대우였다는 걸까. 세아는 속으로 되물었으나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사관 하나가 끼어들어 본론을 꺼냈다. "북부의 실종 사건과 관련해, 백하린 영애께서는 이세아와 함께 마지막으로 은랑을 다루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약 이양 과정에서 이상 현상이 없었습니까." 그 질문에 백하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으나, 곧 다시 부드러운 미소로 되돌아갔다. "이상 현상이라니요. 계약은 정상적으로 이양되었습니다. 은랑도 지금 저와 완벽하게 결속되어 있고요." 완벽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그 말에, 세아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은랑이 자신을 잊었을까? 그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그녀는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탁자 밑에서 두 손을 맞잡아 떨림을 눌렀는데, 그 떨림은 분노인지 두려움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다른 조사관이 서류를 뒤적이며 덧붙였다. "이양 절차상의 서류에는 이세아 님의 서명이 없더군요. 원래 성수 계약 이양에는 양측의 서명이 필수인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질문에 백하린이 아주 짧게, 그러나 눈에 보일 정도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건... 당시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절차상의 누락이 있었을 겁니다. 이세아 님도 그 사정을 아실 텐데요." 그녀가 곁눈질로 세아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부탁이 아니라 경고가 담겨 있었다. 세아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급박한 상황이라니, 그날 자신을 왕궁 밖으로 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백하린의 명령이었다는 걸 이 자리에서 밝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세아가 낮게 말을 이었다. "완벽하게 결속되었다면, 왜 은랑을 데려오지 않으셨을까요. 이 자리는 국경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듣기 위한 자리라고 들었는데, 성수의 증언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회의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가스등 심지가 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정적이 내려앉았고, 조사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하린에게 쏠렸다. 백하린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완벽한 미소가 걷혔다. "은랑은...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요." 그녀가 서둘러 답했으나, 그 답변의 속도가 오히려 그 말의 거짓됨을 드러냈다. 조사관들 중 몇몇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그중 하나는 노트에 무언가를 재빨리 적어 넣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여쭤도 될까요." 세아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백하린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동안 세아 앞에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균열이었다. "그건 제가 답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요. 여기는 국경 사건에 대한 조사 자리 아닌가요." 백하린이 목소리를 높이며 반격했으나, 그 반격은 오히려 회의실 안 사람들에게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조사관들이 그 답변을 받아 적는 사이, 백하린이 세아를 향해 낮게, 그러나 회의실 안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속삭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좋게 지내자고 했는데,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네요. 남의 일에 자꾸 끼어드는 버릇 말이에요." 그 속삭임에는 예의라는 가면이 완전히 벗겨진 순수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세아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대유국에 있을 때였다면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얼어붙었을 것이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 경멸 속에서 백하린이 감추고 있는 불안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회의실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조사국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실종된 아이의 부모들이 이세아를 내놓으라며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외침에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비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벌써 조사국 정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터지는 고성이 유리창을 타고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세아는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백하린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옅게, 승리를 예감한 듯한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를 본 순간 세아는 이 모든 소란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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