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당했더니 살 것 같네요

3화

왕도에서 조사관이 도착하기 전, 초소 앞에는 뜻밖의 행렬이 먼저 도착했다. 국경 마을은 원래 조용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하루에 몇 대가 지나가는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마차와, 겨울이면 눈보다 먼저 내리는 안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마차 다섯 대가 줄지어 국경 길을 넘어오자,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길가로 몰려나왔다. 대유국과 청현국 사이의 국경 지대에는 종종 양국 사절이 오간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 화려함을 실제로 본 사람은 드물었다. 하물며 그 시기가 이세아가 초소에 갇혀 있는 때와 겹친 것은, 우연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것은 이헌 왕태자였다. 대유국의 왕위 계승자로서, 국경 지대의 방비 상태를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청현국을 방문한 것이라 했다. 그가 걸친 외투에는 대유국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은실로 정교하게 박혀 있었는데, 그 문양은 세아가 왕궁에 있던 시절 매일같이 마주하던 것이었다. 문양을 보는 순간 그녀의 위장 어딘가가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옆에는 백하린이 서 있었는데, 금발과 청안이 세아와 놀랍도록 닮아 있어 초소의 병사들조차 처음엔 두 사람을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백하린의 걸음걸이에는 세아가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여유가 있었고, 그 여유는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자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세아가 걸을 때는 땅을 살피며 걸었고, 백하린이 걸을 때는 땅이 알아서 비켜주는 것처럼 걸었다. 같은 색의 눈,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두 사람이 이토록 다르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세아에게는 오래전부터 익숙한 아이러니였다. "저 안에 있는 게 정말 그 아이인가." 이헌이 초소 문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예의를 갖춘 듯한 격식이 배어 있었으나, 그 격식 아래로 숨길 수 없는 경멸이 흘렀다. 세아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대유국 왕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헌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위험한 임무를 앞두고 두려워하던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당신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속삭이던 목소리였다. 그날 그의 눈빛에는 진심이라 믿고 싶을 만큼의 다정함이 있었다. 그 다정함이 전부 계산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녀가 은랑을 잃고 왕궁 앞뜰에서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그날이었다. 그날 이헌은 앞뜰에 서서,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초소 문이 열리고 세아가 끌려 나오자, 병사들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든 채로 흔들렸다. 사슬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아침 공기 속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백하린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세아 씨." 존댓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냉기는 존댓말로 가려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이 사라진 뒤 얼마나 조용해졌는지 몰라요. 덕분에 저는 처음으로 제 이름으로 불려 봤답니다." 그 말에 세아는 손끝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성녀의 이름을 대신 짊어지고 살아온 세 해 동안, 그녀는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헤아려 보았으나 손가락이 모자랐다. 사람들은 그녀를 성녀라 불렀고, 병사들은 그녀를 죄인이라 불렀다. 세아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부른 사람은, 놀랍게도 국경을 넘은 뒤에야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세아가 겨우 그렇게 물었을 때, 이헌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답했다. "국경 시찰이다. 그리고 마침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지. 북부에서 실종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낯익은 얼굴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 말이야."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근처, 흑연이 숨어 있는 옷깃 자락에 잠시 머물렀다. 세아는 그 시선이 자신의 옷깃을 훑고 지나가는 짧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흑연이 놀라지 않도록, 옷깃 안쪽에서 가만히 몸을 사려주는 게 느껴졌다. "저 정령을 알아보겠는데. 백하린, 네가 버린 그 사역마 아닌가?" 그가 묻자 백하린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린 게 아니라, 어울리는 곳으로 보낸 거죠." 그 말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으나, 그 조롱을 들으면서도 세아는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세 해 동안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국경을 넘는 사이 이미 조금은 단단해져 있었던 것이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인데, 지금의 그녀는 그 말을 그저 듣고, 흘려보낼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두 분이 여기까지 오신 건, 저 하나를 확인하러 온 게 아닐 텐데요." 세아가 낮게 말하자, 이헌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 짧은 흔들림을 세아는 놓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자의 표정. 이헌은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숨김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의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백하린 역시 그 흔들림을 눈치챈 듯 이헌을 슬쩍 바라보았으나, 곧 다시 세아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상상은 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군요." 그 말투는 여전히 우아했으나, 그 우아함 뒤로 감추지 못한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그 순간 강태오가 급히 다가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조심스레 말했다. "두 분, 왕도의 조사관이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죄인의 처분은 청현국 법에 따라 진행될 것이니, 대유국 측에서는 관여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이헌은 옅게 웃으며 물러났으나, 그 웃음 안에는 세아가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감춰져 있었다. 안개가 짙어지는 초소 앞에서, 그 웃음만이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