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만물의 버프 추출사

5화

다음 날, 나는 약재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갈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하윤석 관장이 사람을 보내 다른 일을 시켰다. 창고 뒤편에 쌓인 마른 약초 더미를 다시 분류하라는 지시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시킨 대로 움직였다. 괜히 튀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소문은 하루 만에 의당 전체에 퍼졌다. 서진혁이 갑자기 몸이 상해 며칠 요양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들 과로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눈치였다. 누군가는 밤늦게까지 무리하게 수련을 했다더라, 누군가는 원래 몸이 약했는데 이번에 탈이 난 거라더라, 저마다 다른 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뽑아낸 게 단순한 기력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말하는 '혈기'라는 속성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서진혁의 몸에서 눈에 보이는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것도. 아무도 모르는 진짜 원인을 나만 알고 있다는 게, 묘하게 불편했다. 죄책감은 아니었다. 그냥, 누군가의 몸에서 뭔가를 빼앗았다는 감각이 자꾸 손끝에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를 며칠 뒤 다시 마주쳤을 때, 예전만큼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걸음걸이가 조금 느려졌고, 목소리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안색도 그랬다. 전에는 볕에 그을린 것처럼 붉었던 얼굴이 지금은 누렇게 뜬 것처럼 보였다. 물론 완전히 무력해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는 적의가 선명했다. "두고 보자." 마주치는 순간 그가 낮게 흘린 말이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는데도, 그 세 글자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굳이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관장이 이 일을 묵인해준 이상, 지금 당장 그가 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두고 보긴 하겠지. 근데 그 전에 네 몸부터 좀 추스르는 게 낫지 않겠냐. 하윤석 관장은 그날 이후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저 이름 모를 신입 취급이었는데, 이제는 가끔 내가 하는 일을 지나가며 유심히 살펴보는 눈치였다. 말은 걸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한 번은 내가 약재 무게를 재는 걸 저만치서 지켜보다가, 내가 눈치채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약재실 업무도 조금 늘었다. 이전엔 그저 손질과 분류만 시켰는데, 이제는 상한 약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재고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도 맡겼다. 곰팡이가 핀 당귀 뿌리를 골라내는 법, 습기를 먹어 변색된 감초를 구분하는 법, 재고 목록을 장부에 적어 넣는 법까지. 처음엔 단순한 잡일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해보니 손이 많이 갔다. 상한 약재 한 뿌리를 잘못 넘기면 그걸 먹은 환자가 탈이 날 수도 있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다른 수습생들 사이에서는 '관장님이 이도진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옆줄에서 약재를 씻던 마른 체구의 수습생 하나가 지나가듯 나에게 물었다. "너 요즘 관장님이랑 뭐 있냐?" "없습니다." "에이, 그럴 리가. 요새 계속 너만 보시던데." 나는 대답 없이 손에 든 약재를 다시 정리했다. 좋은 신호이면서도 위험한 신호였다. 관심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눈에 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눈에 띈다는 건, 서진혁 무리한테는 더 좋은 표적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진혁의 무리는 여전히 나를 곱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서진혁이 힘을 잃은 뒤로, 그를 따르던 이들이 더 예민하게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마치 자기들 우두머리가 밀린 이유가 나한테 있다는 걸 반쯤 눈치챈 것처럼. 복도에서 마주치면 대놓고 시선을 피하거나, 아니면 노골적으로 훑어보고 지나갔다. 어느 쪽이든 편할 리 없었다. 예비 평가일이 다가왔다. 마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습생들이 각자 준비한 탕약과 조제 도구를 늘어놓고 있었다. 절구, 저울, 작은 화로, 약재를 담은 광목 자루들이 줄지어 놓였다. 공기 중에는 온갖 약초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어떤 건 쌉쌀했고, 어떤 건 매웠고, 어떤 건 그냥 흙냄새 같았다. 나도 며칠 전부터 준비한 재료를 들고 그 줄에 섰다. 다른 이들의 재료보다 확실히 신선했다. 색이 진했고, 잘랐을 때 나는 냄새도 더 또렷했다. 아무도 몰랐지만, 그 신선함의 절반은 내 오른손에서 나온 거였다. 겉으로는 그냥 손질을 잘한 걸로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매일 밤 몰래 손을 뻗어 시들어가는 약재에 조금씩 기운을 흘려 넣은 결과였다. 옆에 서 있던 수습생이 내 재료를 슬쩍 보고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거 어디서 구했냐. 색이 왜 이렇게 좋아." "운이 좋았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운이 아니라 손이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하윤석 관장이 줄을 따라 걸으며 각자의 조제를 확인했다. 걸음이 느렸고, 한 사람 앞에서 멈출 때마다 손끝으로 약재를 살짝 들어보거나 코끝을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서진혁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별말 없이 지나쳤다. 서진혁의 얼굴이 굳었다. 평소 같으면 관장이 그의 조제를 두고 짧게라도 칭찬을 했을 텐데, 이번엔 그냥 지나쳐 버린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서진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내 앞에 왔을 때, 관장은 내가 준비한 탕약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냄새를 맡고, 색을 확인하고, 손끝으로 살짝 찍어보기까지 했다. 손끝에 묻은 걸 혀에 살짝 대보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 숨을 죽였다. 혹시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채면 어쩌나 싶었다. "재료가 좋군."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옆에 서 있던 다른 수습생들의 표정을 바꿔놓았다. 몇몇은 눈에 띄게 놀란 얼굴이었고, 몇몇은 대놓고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나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거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서진혁 무리한테 더 크게 찍히겠는데. 실제로 관장이 지나간 뒤, 옆줄에 서 있던 서진혁의 추종자 하나가 나를 곁눈질로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이 마당을 가로질러 등에 꽂히는 것 같았다. 좋은 성과와 위험한 시선. 둘 다 동시에 쌓이고 있었다. 평가는 오후까지 이어졌다. 각 수습생이 자기 탕약을 관장 앞에서 설명하고, 몇몇은 실제 환자 진료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듯 평가받았다. 나이 든 남자 환자 역할을 맡은 조교 앞에서 맥을 짚어보라는 지시를 받은 수습생도 있었고, 가짜 처방전을 두고 관장에게 조목조목 지적을 당하는 수습생도 있었다. 나는 아직 진료 실습까지는 배정받지 못한 낮은 서열이라, 약재 준비 평가 정도로 마무리됐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애매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마당은 조용해졌다. 수습생들은 하나둘 도구를 정리하고 흩어졌다. 나는 마지막까지 남아 절구를 씻었다.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결과는 그날 저녁 늦게 게시판에 붙었다. 예비 순위였다. 정식 명단은 아니었지만, 최종 선발에 크게 반영된다는 그 순위표. 등불 아래 사람들이 몰려서서 목을 빼고 순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낮게 탄식을 흘렸고, 누군가는 안도한 듯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선 게시판 뒤쪽에서 목을 빼고 들여다봤다. 내 이름이 있었다. 열두 명 중 다섯 번째. 낮은 순위는 아니었다. 세 자리 안에 들기에는 여전히 부족했지만, 처음 배정받았을 때의 하찮은 위치보다는 확실히 올라온 자리였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않던 수습생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순위표 위쪽에 이름이 박혀 있었다. 서진혁의 이름은 두 번째였다. 여전히 상위권이었다. 몸이 예전만 못하다고 해서 실력까지 통째로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는 그동안 쌓아온 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언제까지고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도 다시 확인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세 자리, 그 안에 들어야 정식 학도가 되고, 통행증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 그래야 언젠가 천명탑으로 향할 길이 열린다. 다섯 번째와 세 번째 사이의 거리는 숫자로는 두 자리였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먼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과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두 가지 목표가 하나의 길 위에 놓여 있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서씨 의당에서 인정받는 것, 그게 곧 집으로 돌아가는 첫걸음이었다. 방구석에 누워 천장을 보며 그 생각을 몇 번이나 되씹었다. 잠은 늦게 왔다. 동시에 알게 된 건 또 있었다. 며칠 뒤, 약재실로 낯선 이가 하나 찾아왔다. 짙은 남색 옷을 입고, 걸음걸이가 유독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서씨 의당 본채의 심부름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며칠 뒤 마을에 귀족 신분의 손님이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명한 의원의 진료를 특별히 청하는 손님이라고 했다. "높은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밝히지 말라 하셨고요." 심부름꾼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는 약재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봤다. "이명한 의원님이 이번에는 수습생 하나를 배석시키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관장님이 정하실 겁니다." "수습생을요?" "예. 그것도 관장님께서 직접 고르라 하셨답니다. 아무나 세우진 않으실 거예요." 심부름꾼이 그렇게 말하고 돌아간 뒤,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손에 든 약재 자루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배석 대상이 누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게 나라면, 이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시험이 될 거였다. 약재를 몰래 되살리는 것과, 살아 있는 사람 앞에서 진료를 돕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하나는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손끝을 놀리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귀족이라는 사람 앞에서, 그것도 이명한 의원이라는 사람의 시선 아래서 실수 없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었다. 손이 조금이라도 떨리면 바로 눈에 띌 거였다. 창밖으로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그 붉은 빛을 보며,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의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진혁과의 일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제는 순위표 걱정을 하고, 또 그 다음엔 얼굴도 모르는 귀족 손님과 배석 문제까지 신경 써야 했다. 관장이 나를 고를지, 다른 누군가를 고를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며칠 안에 그 답이 나온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답이 나오는 순간, 나는 또 다른 종류의 무대 위에 서게 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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