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에도 로그아웃은 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손목을 더듬었다. 게임 인터페이스를 불러오는 버튼, 상태창 아이콘, 하다못해 시스템 알림창 하나라도 뜨길 바랐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방 안을 둘러봤다. 흙벽에 짚으로 엮은 지붕, 나무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빛. 어제와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어제는 그게 신기했고 오늘은 그게 무서웠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휘저어봤다. 메뉴창, 나와라. 아무 반응 없었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몇 번 눌러보고, 숫자를 세어보고, 심지어 어릴 때 유행했던 게임 치트키까지 입 밖으로 중얼거려봤다. 다 소용없었다. 나는 결국 인정했다.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게임이었던 무언가가 진짜였다. 천명계 체험관에 들어갈 때 스캔했던 내 생체 정보가 이 세계 어딘가로 옮겨져서, 이 몸에 눌러앉은 거였다. 어떻게, 왜, 그런 원리는 알 수 없었다.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어떻게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밖으로 나가 마을 어귀 정자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노인들이 그 자리에 항상 모여 있었고, 그들의 대화는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는 유일한 정보원이었다.
"이번 학도 시험 때문에 청림촌이 또 시끄럽겠구먼."
"시끄러운 게 하루 이틀이야. 천명탑 소식은 못 들었나?"
"본점 쪽에서 또 정상까지 오른 자가 나왔다더군. 하늘이 그 소원을 들어줬다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못 들은 척 정자 기둥 옆에 서서 신발끈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노인들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소원이라는 게 뭐 별거 있겠나. 재물, 명예, 뭐 그런 거지."
"별거 있지.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자도 있었다더군.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던가, 뭐라던가."
그 말이 귀에 꽂히는 순간, 나는 그게 이 게임의, 아니 이 세계의 최종 목표라는 걸 직감했다. 다만 이 세계에서는 그게 신화이자 현실이었다. '천명탑'이라는 이름, 정상에 오르면 하늘이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소원 중에는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있다는 사실.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거기까지 가면 된다.'
간단했다. 문제는 청림촌에서 천명탑까지 가는 길이 최소 몇 달, 정식 학도가 되어 노비 신분이 아닌 자유인의 통행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 신분은 서씨 의당의 '의료 수습생'이라는 것이었다.
수습생 신분으로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통행증 발급은 서씨 의당의 관장, 혹은 정식 학도 자격을 얻은 자만 신청할 수 있었다. 즉, 내가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는다는 건 곧 서씨 의당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도망칠까 잠깐 생각했다. 짐 몇 개 챙겨 산길로 튀는 게 빠르지 않을까. 밤에 몰래 빠져나가서 방향만 대충 잡고 걷다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마을 밖은 몬스터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고, 나는 게임 속 스탯창도 열리지 않는 몸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야생에 뛰어들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칼 한 자루 없이, 지도도 없이, 심지어 이 세계 화폐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산길에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였다. 나는 그 정도 계산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생 얼굴이 떠올랐다.
등록금 마감이 사흘 남았다고 했다. 내가 지금 이 세계에서 며칠을 보내는 사이 원래 세계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만약 시간이 똑같이 흐른다면, 동생은 등록금을 못 내고 있을 거였다. 부모님은 또 병원 진료를 미루고 있을 거였다. 아버지 무릎 수술 날짜를 두 번이나 미뤘던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엔 세 번째가 될지도 몰랐다.
핸드폰이 있었다면 문자 한 통이라도 보냈을 텐데. 여긴 핸드폰도, 신호도,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이렇게까지 답답할 줄 몰랐다.
괜찮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여기서 최대한 빨리, 최대한 안전하게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서씨 의당이라는 곳에서 정식 학도 자격을 얻어야 했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지금은 이 자리를 지키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이도진 수습생."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어제 그 남자였다. 이름은 아직 몰랐다. 어제 내게 절구질과 약재 손질하는 법을 가르쳐준, 무뚝뚝하지만 딱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던 그 남자.
"관장님께서 부르신다. 정식 학도 선발 관련해서 안내가 있을 거다."
정식 학도 선발.
반가운 단어였다. 나는 절구를 내려놓고 손에 묻은 가루를 옷자락에 대충 닦아낸 뒤 그를 따라갔다.
서씨 의당의 본채는 청림촌에서 제일 큰 목조 건물이었다. 기와지붕이 아니라 짚으로 엮은 지붕이었지만, 규모가 상당했다. 대들보만 해도 내 팔로 두 바퀴는 감아야 할 정도로 두꺼웠고, 마당은 웬만한 학교 운동장 절반쯤 됐다. 마당에는 이미 수습생 몇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이대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렸다. 다들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쟤가 그 이도진이야?"
"어제 절구질도 제대로 못 했다던데."
"손질도 느리고, 약초 이름도 모른다며?"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못 들은 척했다. 이런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나. 신입 사원이 첫 출근한 날 팀원들끼리 수군거리는 그 느낌과 정확히 똑같았다. 다만 여기는 잘못하면 정말로 굶어 죽거나 마을 밖으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회사에서는 최악의 경우가 퇴사였다면, 여기서는 최악의 경우가 노비 신분으로 평생 남는 거였다. 비교 자체가 불공평했다.
마당 앞쪽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오십 대쯤으로 보이는, 짙은 눈썹과 흰머리가 섞인 상투를 튼 남자였다.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이 자리의 서열이 느껴졌다. 등을 곧게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시선은 마당 전체를 훑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화가 난 것도 아닌, 그냥 원래 그런 얼굴인 사람 같았다.
"하윤석 관장이다."
누군가 옆에서 낮게 알려줬다. 청림촌 분점의 관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올해 정식 학도 선발은 예년보다 자리가 적다." 하윤석 관장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본점에서 정한 인원은 세 명. 이 마당에 있는 수습생 중 세 명만이 학도가 되어 통행증을 받고, 나머지는 계속 이 자리에서 수습으로 남는다."
세 명. 마당에 서 있는 수습생을 대략 셈해보니 열두어 명 정도였다. 경쟁률이 상당했다.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굴렸다. 열두 명 중 세 명. 대충 사분의 일. 회사 신입 공채 경쟁률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숫자는 절대 아니었다.
"선발 기준은 실기와 평판이다. 매달 있는 실전 진료와, 평상시 태도를 평가에 반영한다." 관장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실기 평가는 실제 환자를 상대로 이루어진다. 진맥, 처방, 시술 전 과정을 지켜보고 점수를 매긴다. 평판은 다른 수습생들과 정식 학도, 의당의 어른들 평가를 종합한다."
실제 환자. 그 말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이 세계에서 의술이라는 게 정확히 어느 수준인지도 모르는데, 사람 몸에 뭘 하려면 그 전에 최소한의 지식은 있어야 할 거였다. 나는 이 세계 약초 이름 하나도 제대로 못 외운 상태였다.
관장이 말을 마치자 앞줄에 서 있던 한 청년이 손을 들었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어딘가 자신감이 몸에서 새어 나오는 인상이었다. 옷차림도 다른 수습생들보다 확실히 좋았다. 소매 끝에 문양이 새겨진 자수까지 있었다.
"관장님, 이번에도 제가 필두겠지요?"
주변 몇몇이 웃음을 참는 듯 어깨를 흔들었다. 관장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에 부정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명확한 대답 같았다.
"서진혁 수습생, 자만은 화를 부른다."
그 말이 다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답이 나온 셈이었다. 관장이 저 정도 말로 넘겼다는 건, 실제로는 저 청년이 매번 선두를 지켜왔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최소한 그럴 자격이 있다고 다들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거나.
서진혁.
의당 이름이 서씨 의당이었으니, 저 남자가 본가 쪽 사람일 거라는 추측이 저절로 들었다. 관장이 뭐라 나무라도 그 태도가 크게 변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을 거였다. 회사로 치면 사장 조카쯤 되는 셈이었다. 아무리 실적이 안 좋아도 함부로 자를 수 없는 존재.
서진혁이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위에서 아래로, 발끝까지 훑어보는 눈빛이었다. 옷차림, 손, 신발까지 하나하나 스캔하듯이.
"네가 새로 온 이도진이라는 애구나. 손질이 그렇게 느리다며?"
존댓말을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저 말투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네, 아직 서툽니다."
나는 격식을 갖춰 대답했다. 속으로는 다른 말을 삼켰다. '느리다고 소문낼 시간에 절구질이나 좀 배워라, 넌.' 물론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상급자한테 대드는 건 회사에서 팀장한테 반차 씹히고 대드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었다.
서진혁은 픽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웃음에 담긴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자기 밑에 두고 볼 만한 애 정도로 나를 분류한 거였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수습생 하나가 서진혁을 향해 낮게 뭐라 속삭였고, 서진혁은 그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는 자리였을 거였다.
괜찮다.
나는 다시 속으로 되뇌었다. 세 자리 안에 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저 서진혁이라는 사람이 걸림돌이 될 거라는 것. 이 두 가지 사실만 확실히 챙기고 나머지는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저 남자와 신경전 벌인다고 순위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부터 수습 업무 배정을 다시 한다." 하윤석 관장이 말했다. 손에 든 목간을 펼치더니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박세온 수습생은 진맥실. 유하경 수습생은 침구실." 이름이 계속 이어졌다. 다들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미묘하게 반응이 달랐다. 몇몇은 안도한 표정, 몇몇은 뭔가 아쉬운 표정. 나는 그 반응만 봐도 각 부서의 서열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도진 수습생은 약재실로."
약재실.
나는 그 순간, 이 배정이 얼마나 하찮은 자리인지 다른 수습생들의 표정으로 눈치챘다. 다들 안도한 얼굴이었다. 경쟁자가 하나 줄었다는 표정. 몇 명은 심지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참는 기색까지 보였다.
"약재실이라니, 거긴 그냥 창고 정리하는 곳 아니야?"
"실기 평가랑 아예 관련이 없잖아."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겉으로는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세 자리 안에 들려면 실전 진료 경험이 필요한데, 약재실 배정이라면 그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셈이었다. 회사로 치면 신입인데 총무팀 창고 정리로 배치받은 느낌. 뭔가 크게 밀리고 있다는 감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관장이 마지막으로 마당을 한 번 훑어보고는 몸을 돌려 본채로 들어갔다. 그걸로 오늘의 안내는 끝이었다. 수습생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고, 서진혁은 나를 지나치며 어깨를 슬쩍 스쳤다. 사과 한마디 없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어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남자를 따라 약재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흙바닥이 밟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 약재실에서, 내가 이 세계를 뒤집어놓을 첫 실마리를 잡게 될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