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만물의 버프 추출사

4화

그 사건은 정식 학도 선발 예비 평가를 열흘쯤 앞둔 날 일어났다. 예비 평가는 매달 있는 실전 진료 테스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회차였다. 이번 성적이 최종 명단에 크게 반영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확인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일수록 더 잘 퍼지고, 더 잘 먹힌다. 마당에 모인 수습생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다들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상대가 몇 등이나 될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나는 등수를 가늠하기보다, 이번에도 조용히 묻혀 지나가면 그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나는 그날도 평소처럼 약재실에서 일했다. 다만 이번엔 예비 평가에 쓸 약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각 수습생이 스스로 조제한 탕약을 관장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방식이었다. 재료는 각자 손질해서 준비해야 했다. 인삼은 껍질을 벗기고, 감초는 잘라 말리고, 황기는 세척해서 함에 담았다. 손끝이 갈라질 정도로 손을 놀렸는데도 해가 지도록 끝이 안 보였다. 이 바닥은 손보다 입이 편한 사람들이 유독 많다는 걸, 나는 이 무렵 이미 알고 있었다. 서진혁도 약재실에 들렀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보통 그는 잡역들을 시켜 재료를 받아 가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직접 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약재실 안 온도가 한 단계 내려간 것 같았다. 착각이었겠지만, 그런 착각을 자주 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도진." 부르는 말투가 평소보다 낮았다. "네." 나는 손질하던 감초를 내려놓고 몸을 세웠다. 그는 팔짱을 낀 채 함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뭘 찾는 눈치였다. "내 몫으로 손질해놓은 인삼이랑 감초 어디 있나?" 나는 정리된 함을 가리켰다. 그가 뒤적이더니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았다.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그는 손끝으로 인삼 뿌리를 슬쩍 눌러보고, 감초 몇 조각을 손바닥에 굴려보기까지 했다. 뭔가를 의심하는 사람의 몸짓이었는데, 정작 뭘 의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걸 챙기고 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참, 이거." 그가 작은 종이 봉투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관장님이 너한테 전해달라고 하시더라. 예비 평가 전에 몸보신하라고, 특별히 챙겨주신 거야." 나는 순간 의아했다. 관장이 나한테 이런 걸 챙겨줄 이유가 없었다.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나는 늘 눈치를 보는 쪼그만 신입이었을 뿐이니까. 관장이 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지도 확신이 안 서는 상황이었는데, 몸보신용 약재를 따로 챙겨준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혁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아니, 있었다. 나는 그 생각을 그때 미처 하지 못했다. 그가 이름 없는 수습생 하나를 신경 써서 골탕 먹일 이유가 뭐가 있겠나 싶었던 거다. 그 판단 자체가 틀렸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감사합니다." 나는 봉투를 받아 챙겼다. 안에는 갈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약재 특유의 씁쓸한 향이 났다. 특별히 이상한 건 없어 보였다. 색도 흔한 한약재 가루와 비슷했고, 입자도 곱게 갈려 있었다. 이 정도면 어디서든 파는 몸보신용 가루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나는 그걸 옷 안주머니에 넣고 다시 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나는 그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다. 특별한 의식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뜨거운 물에 풀어서, 냄새 한 번 맡고, 삼켰다. 목 안이 살짝 쓰렸다. 몸보신용이라기엔 좀 독한 맛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 증세가 시작됐다. 머리가 무거워지고, 눈앞이 흐려지고, 손끝이 떨렸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빠졌다. 벽을 짚고 서 있었는데도 자꾸 시야가 기울었다. 방바닥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처럼 보였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쏠리는 것처럼 보였다. 속이 뒤집히는 느낌도 있었지만 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생각이 자꾸 끊어진다는 거였다. 방금 뭘 하려고 했는지가 순간순간 사라졌다. '이거 뭔가 잘못됐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관장이 그런 걸 보낼 이유가 없다는 걸, 애초에 이상하게 여겨야 했던 거였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럴 때 뒤늦은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쾅. 서진혁이었다. 뒤에 다른 수습생 두 명도 서 있었다. 얼굴들에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재미있는 걸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몸이 좀 이상하지?"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너, 뭘 먹였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발음이 뭉개졌다. 혀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굴러다녔다. "별건 아니야. 정신을 흐리는 약이지. 예비 평가에서 정신 못 차리고 실수하면, 넌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고. 나야 뭐, 도와준 거지. 애초에 세 자리 안에 들어올 애도 아니었잖아." 그가 웃으며 다가왔다. 뒤에 선 두 명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했다. 누구도 나를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안에서 나는 그냥 신입이었고, 신입은 이럴 때 아무도 편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숨이 가팔라졌다. 이대로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몸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손끝부터 저려오는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최악의 상상들이 순서 없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손바닥이 다시 뜨거워졌다. 반사적인 감각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몸이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오른손이 스스로 움직였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서진혁의 팔목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혔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그가 나를 밀치려다가 팔이 잡힌 것이었다. 그의 손목뼈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뭔가 익숙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눈앞에 창이 떴다. '대상: 서진혁 / 잔존 속성 감지: 혈기(중급) / 대상의 생명 기운이 급격히 소진되는 조건 감지됨. 추출 가능.' 나는 판단할 틈도 없었다. 흐린 정신 속에서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그냥 뽑아냈다. 순간, 서진혁이 크게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갑자기..."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방금까지 웃고 있던 낯빛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몸에서 뭔가 결정적인 게 빠져나간 사람처럼, 다리가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 나를 비웃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동시에 내 오른손 손목에 뭔가 자리 잡는 느낌이 왔다. 아까와 비슷한 충전 감각이었다. 다만 이번엔 훨씬 강하고 뜨거웠다. 마치 손목 안쪽에서 작은 불씨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혈기(중급) 1회분 확보.' 나는 홀린 듯 그 창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바로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몸이 살길을 찾는 그 순간의 본능이었다. 생각할 겨를이 있었다면 조금 더 신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엔 생각이라는 사치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주입되자마자 흐렸던 시야가 조금씩 맑아졌다.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정신을 놓지 않을 정도는 됐다. 벽을 짚었던 손도 조금씩 힘을 되찾았다. 방 안은 조용해졌다. 서진혁을 따라온 두 명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웃고 있던 표정들이 순식간에 굳어 있었다. "뭐, 뭐야, 저거..." "서진혁, 너 왜 그래?" 서진혁은 바닥에 앉아 헐떡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눈에 분노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너 지금 뭘 한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여유도 없었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손을 뻗었더니 저 사람의 뭔가가 내 손으로 넘어왔다, 이런 말을 누가 믿어줄까. 그때,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문 앞에서 멈췄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하윤석 관장이었다. 그가 들어서서 방 안 풍경을 훑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이는 서진혁, 흐트러진 몸으로 벽에 기대선 나,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빈 종이 봉투. 그 짧은 순간, 그의 시선이 방 안 구석구석을 빠르게 스캔하는 게 느껴졌다. 관장의 시선이 그 봉투에 잠깐 머물렀다. 그다음 서진혁에게, 그다음 나에게 옮겨갔다. 세 번의 시선이 오가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 뭔가를 이해한 얼굴이었다. "서진혁, 자리로 돌아가라."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진혁이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관장이 다시 한번 짧게 말했다. "돌아가라 했다." 목소리에 실린 무게가 조금 더 늘었다. 서진혁은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그 눈빛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거기 담긴 건 분명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예고이기도 했다. 따라온 두 명도 서둘러 뒤따랐다. 뭐라 한마디씩 중얼거리며 나가는 걸 보니,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방 안에는 나와 관장만 남았다. 관장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이 방에서 벌어진 일을 대략 짐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짐작이 정확히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가 문제였다. 내가 뭘 했는지, 그 능력의 실체가 뭔지, 관장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나로서는 짐작할 도리가 없었다. "관장님." 나는 입을 열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마음속에서 문장이 여러 개 뒤섞였다. 봉투 얘기부터 해야 할지, 서진혁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야 할지, 아니면 그냥 이 모든 걸 사고였다고 우겨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관장은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묻지 않겠다." 두 글자 한 문장인데도 그 안에 담긴 뜻이 여러 겹이었다. 묻지 않겠다는 건, 궁금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다. 알고 있어도 캐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 차이가 주는 압박이 만만치 않았다. 그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다가, 문턱에 멈춰 다시 말했다. "오늘 밤 일은, 내가 못 본 걸로 하겠다." 그 말만 남기고 그는 그대로 나갔다. 방 안에 나 혼자 남았다. 손목에는 여전히 뜨거운 감각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아무 표시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손이었다. 방금 그 손으로 사람의 목숨줄 같은 걸 끌어당겼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손바닥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다행이다. 일단 오늘 밤은 넘겼다. 몸도 회복됐고, 관장도 캐묻지 않기로 했고, 서진혁의 협박도 당장은 아무 효력이 없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관장이 '못 본 걸로 하겠다'는 그 말이, 앞으로 나와 그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나는 그 순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못 본 척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어딘가에 계속 기억해두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기억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쓰일지,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서진혁이 이 일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방을 나가며 나를 스쳐 지나간 그 시선. 거기 담겨 있던 건 패배를 인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음 수를 계산하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 계산이 무엇으로 이어질지, 나는 그날 밤엔 짐작할 수 없었다. 손목의 열기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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