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누명 씌웠으니, 후회하게 해줄게

5화

진헌이 그녀의 손목을 응시하던 그 짧은 순간, 대전의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는데, 그 무게를 느낀 건 은우 하나만이 아니었던 듯 대신들 역시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촛대에 걸린 불빛이 대신들의 옷자락 위로 흔들리며 그림자를 늘였다 줄였다 했고, 그 정적 속에서 누군가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마저 크게 울릴 것 같았다. 진헌은 다시 용좌로 돌아가 앉으며 손짓으로 대신들을 물러가게 했고, 대전에는 이내 그와 은우, 그리고 몇 명의 근위병만이 남았다. 발소리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울렸는데, 그 소리는 마치 은우의 퇴로 하나가 완전히 봉쇄되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군." 그가 말했는데, 그 말은 청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진헌이 인간을 이토록 경계하게 된 데에는 오래된 사연이 있었다. 삼십 년 전, 흑명국이 지금보다 더 척박했던 시절, 대현국에서 생제로 보내진 한 성녀가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온순하고 순종적인 태도로 흑명국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심지어 당시 어린 왕자였던 진헌에게도 다정하게 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밤마다 자장가를 불러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상처 난 그의 무릎에 손수 약초를 발라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흑명국에 머무는 동안 몰래 협곡의 봉인석을 조사해 그 위치와 약점을 대현국에 넘겼고, 그 정보로 대현국의 원정군이 협곡을 뚫고 흑명국 깊숙이까지 침입했던 일이 있었다. 수많은 흑명국 백성이 그 침입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그 성녀는 임무를 마치자마자 대현국으로 돌아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대현국의 사관들은 그녀를 두고 '어둠의 나라에 빛을 가져간 자'라 칭송했다고 하는데, 흑명국의 입장에서 그것은 그저 배신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진헌은 그날의 화재를, 성벽이 무너지던 소리를, 그리고 그 성녀가 떠나던 뒷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어린 왕자였던 그는 궁의 지하 통로에 숨어 그 모든 소리를 들었으며, 훗날 자신이 왕위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명령한 것이 바로 그 통로를 봉쇄하는 일이었다. 그때 그가 배운 것은 단 하나였다. 인간의 다정함은 목적을 위한 가면일 뿐이며, 성녀라는 이름은 그 가면 중에서도 가장 정교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인간을 신뢰하지 않았고, 특히 성녀라는 이름을 가진 자에게는 어떤 온정도 베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다짐이 냉혹한 용황이라는 별명을 만든 근원이었다는 걸, 대현국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흑명국의 왕이 원래부터 잔혹한 자라 여겼을 뿐, 그 잔혹함의 뿌리가 한 인간의 배신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당신의 손목에 남은 자국." 진헌이 은우를 향해 물었다. "봉인의 흔적치고는 흔치 않은 형태던데." 은우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 흔적을 알아볼 만큼 그가 마법에 대해 깊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의 귀족이나 관료라면 봉인석의 흔적과 단순한 화상의 흔적조차 구분하지 못했을 것인데, 그는 한눈에 그것이 마력을 억제하기 위한 낙인임을 알아본 것이다. "제 어머니가 걸어놓은 것입니다." 은우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제 마력이 지나치게 강해서라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애썼지만, 손끝은 이미 저절로 소맷단을 움켜쥐고 있었다. 진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한 마력을 가진 성녀가, 죄인이 되어 이곳에 생제로 보내졌다." 그가 그 말을 되짚으며 웃음기 없는 웃음을 지었다. "흥미로운 우연이군." 그 말속에는 의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이미 그녀를 또 하나의 위장된 첩자로 규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다시 얼굴로 오가며 마치 거짓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듯 집요하게 움직였다. "저는 정치를 위해 이용된 것뿐입니다." 은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손목의 낙인이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어머니의 결정이었으며, 생제로 보내진 것 역시 그녀가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는 알아야 했다. 그러자 진헌이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낮게 물었다. "그 말을 그 성녀도 똑같이 했었지. 이용된 것뿐이라고. 그리고 우리 흑명국의 백성들을 이용해 자신의 나라를 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아니라 오랜 세월 굳어버린 차가운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확신은 삼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던 것처럼 견고했다. "저는 그 성녀가 아닙니다." 은우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지,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럼 증명해 보이시오." 진헌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안에는 시험하는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말로는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 은우는 그 확신의 벽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그 성녀가 아니었으나,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당장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이 떨렸다. 목이 메었다. 대전의 높은 천장 아래에서 그녀는 문득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진헌의 금빛 눈이 그녀를 꿰뚫듯 응시하는 가운데,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진짜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내가 직접 밝혀내겠다." 그 말과 함께 대전의 불빛이 순간 일렁였는데, 그것이 단순한 촛불의 흔들림이 아니라는 걸 은우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근위병들의 창끝이 촛불에 반사되어 붉게 빛나는 것을 보며, 은우는 자신이 이제부터 이 왕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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