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대현국과 흑명국 사이에는 삼백 년 전 맺어진 오래된 조약이 있었다. 두 나라의 국경을 이루는 죽음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대현국이 매 십 년마다 흑명국에 생제를 보내야 한다는 굴욕적인 조항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명분은 협곡을 떠도는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기 위함이라 했으나, 실상은 흑명국의 용황에게 바치는 조공에 가까웠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조약을 맺은 대현국의 초대 왕은 그것을 평화의 증표라 불렀고, 후대의 사관들은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굴욕을 평화라 부르는 나라. 은우는 그 사실을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으나, 자신이 그 조공의 몸이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번 생제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누가 될지는 정해지지 않은 채였고, 후작가의 죄인이 된 은우는 그 공백을 채우기에 가장 적합한 존재로 순식간에 낙인찍혔다. 가문에 흠이 되지 않으면서도 나라의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제물. 대신들은 회의석상에서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안도했다고 했다. 마침 죄인이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은우는 아무런 놀라움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예상했던 결말이었으니까.
흑명국의 현 용황, 진헌에 대한 소문은 대현국의 아이들도 자장가처럼 듣고 자랄 만큼 널리 퍼져 있었다. 인간을 혐오하여 국경을 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린다는 이야기부터, 이십 년 전 협곡을 넘본 대현국의 원정군을 단 하룻밤 만에 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냉혹한 용황. 그 별명이 붙은 지 벌써 십수 년이 지났으나 그를 직접 본 적이 있는 대현국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소문은 늘 확인할 수 없는 것일수록 더 화려하게 부풀려졌고, 화려하게 부풀려진 소문은 언제나 사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은우는 마차 안에서 그 소문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자신이 향하는 곳이 대체 어떤 곳인지를 새삼 실감했다. 손끝이 차가웠다. 마차 안의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차가 흑명국의 국경을 넘어서던 순간, 창밖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현국의 푸른 들판 대신 잿빛 안개가 낮게 깔린 황무지가 펼쳐졌고, 멀리 보이는 산맥은 마치 뼈를 드러낸 짐승의 등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땅 위로 마른 바람이 지나갔고, 그 바람에 섞인 흙냄새는 어딘가 탄 냄새를 닮아 있었다. 죽음의 나라라는 별칭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은우는 그 풍경만으로도 깨달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황량함이 낯설지 않았다. 후작가의 저택도, 대현국의 궁도, 결국은 그녀에게 낯선 땅이었으니. 어쩌면 이곳이라면, 그녀가 짊어졌던 명예도 죄명도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명예.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되뇌자 헛웃음이 났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팔려 가는 몸에게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호송을 맡은 대현국 관리는 국경 부근의 초소에서 흑명국 병사들에게 그녀를 인계하며, 형식적인 서류를 건네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는 은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서류에 도장을 찍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은우는 놓치지 않았다.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부끄러운 것일까. 그 관리의 걸음이 그토록 빨랐던 이유를, 은우는 흑명국 병사들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이해했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제 치고는 꽤 멀쩡해 보이는군." 병사 중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의 병사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멀쩡해 봐야 얼마나 가겠어. 용황 폐하 앞에 서면 다 똑같지." 세 번째 병사가 그 말을 받아 낮게 웃었다. "지난번 것보다는 낫네. 그때는 걷지도 못했잖아." 두 병사의 대화가 은우의 귓가에 그대로 흘러들었으나, 그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미 대현국에서 충분히 겪은 시선이었다. 죄인, 도구, 그리고 이제는 생제.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녀를 두고 이야기했지만, 그녀에게 이야기를 건 적은 없었다.
용황성으로 향하는 길에서 은우는 처음으로 흑명국의 백성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마차를 향해 시선을 던지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인간에 대한 경계인지, 아니면 그저 익숙한 무관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길가에 늘어선 낮은 집들은 창을 두꺼운 천으로 가려 두었고, 몇몇 집 앞에는 화롯불이 밤인데도 낮게 타오르고 있었다. 협곡의 사악한 기운을 쫓기 위한 것이라 들었으나, 은우의 눈에는 그저 이 나라 전체가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었구나. 은우는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나는 이제 대현국의 죄인도 아니고, 흑명국의 손님도 아닌, 그저 조약이 요구한 하나의 물건이 되어버린 것이구나. 물건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었다. 그저 생제라는 호칭 하나면 충분했다.
마차가 잠시 멈춰 서서 말을 갈아 태우는 동안, 은우는 마차 문틈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현국의 하늘과 다르지 않은, 그저 조금 더 낮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이었다. 하늘조차 이곳에서는 인간을 환영하지 않는구나 싶어 은우는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병사 하나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웃네." 그가 동료에게 속삭였다. "생제가 웃는 건 처음 보는데." 동료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은우를 흘겨보고는 채찍을 들었다.
용황성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 난 뒤였다. 검은 성벽이 안개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처럼 솟아 있었고, 그 위로 붉은 불빛이 일렁이는 모습이 마치 성 전체가 살아 있는 짐승처럼 느껴졌다. 성벽을 따라 세워진 창들 끝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이 용의 형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용황. 그 이름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소문이 아니라 이 성벽 하나로 충분했다.
마차가 멈춰 서고, 병사들이 그녀를 끌어내리듯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밤바람이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 바람 끝에는 어딘가 탄 재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은우는 그 순간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단순한 알현이 아니라는 걸, 어떤 예감으로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