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등원하자마자,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들었어? 이번 주말에 후작저에서 무도회 열린다던데."
"세하 공작가에서도 초청받았다며. 강시우 공자님도 참석하신다던데."
"공자님 파트너는 누구래? 아직 정해진 데 없다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세하 공작가에서 파트너 없이 참석하시겠어?"
무도회. 사교계의 큰 행사 중 하나였다. 나도 참석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을 터였다. 백작가 영애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번 무도회에 한지훈도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파혼도 안 된 상태로, 그를 다시 마주쳐야 하나.'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그날의 광경을 그려봤다. 화려한 홀 안,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 속에 나란히 서 있어야 할 한지훈. 생각만으로 속이 불편했다.
'차라리 몸이 아프다고 하고 안 갈까.'
'…아니, 그건 백작가 이름에 먹칠하는 짓이지.'
스스로 생각해도 유치한 도피였다. 나는 그 생각을 지우려 애쓰며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는 사이, 강시우가 교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키에 곧은 자세, 늘 그렇듯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서윤 영애."
"…네."
"이번 주말 무도회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런데 그 담담함 뒤에 뭔가 다른 결심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시 파트너 관련 정보를 알려주려는 건가.'
'아니면 무도회 순서에 대한 사무적인 이야기일지도.'
나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측을 세워봤다. 그런데 그 추측은 그의 다음 말에 전부 무너졌다.
"저와 함께 가시죠."
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네?"
"함께 참석하자는 말입니다. 파트너로."
주변에서 지나가던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 순식간에 시선이 몰렸다.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았고, 누군가는 옆 사람을 툭 치며 눈짓했다.
"저, 저기 지금……"
"세하 공작가 공자님이 이서윤 영애한테?"
수군거림이 순식간에 복도를 채웠다. 나는 그 소리들을 애써 무시하며 강시우를 올려다봤다.
"왜 저한테…"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가 되물었다. 나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이유를 떠올려 봤지만,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동정인가.'
'아니면 그냥 정략적인 계산인가.'
'혹시 나를 이용해서 뭔가 얻으려는 건가.'
여러 가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다.
"저는 그냥, 이서윤 영애가 혼자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마음에 안 듭니다."
그의 말은 짧았고, 별다른 수사가 없었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마치 계산 없이 뱉은 말 같아서,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이건 동정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손끝이 미묘하게 저려왔다. 그리고 그 답을 알기도 전에, 복도 저쪽에서 한지훈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이쪽 상황을 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 짧은 순간, 그의 시선이 강시우와 나 사이를 오갔다.
강시우와 한지훈, 그리고 나. 셋이 복도에서 다시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한지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발걸음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어느새 강시우의 앞에 멈춰 섰다.
"강 공자, 지금 뭐 하는…"
"파트너 신청 중입니다."
강시우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마치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태연한 어조였다. 한지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서윤은 아직 내…"
"혼약자입니까?"
강시우가 그의 말을 잘랐다. 목소리에는 별다른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칼끝 같은 냉기는 분명했다.
"소문으로는 다른 분과 정원에서 다정하게 계셨다던데, 아닙니까?"
한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얼굴만 점점 더 붉어질 뿐이었다.
주변에서 몇몇 학생이 숨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는 듯했고, 누군가는 이 상황을 놓칠세라 눈을 크게 뜬 채 우리를 살폈다.
복도의 모든 시선이 이 세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그 중심에서, 이상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마른침이 목 안쪽에서 넘어갔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지.'
'지금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떤 말을 골라도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시우가 다시 나를 향해 돌아봤다. 그 눈빛은 여전히 담담했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구석이 있었다.
"대답은, 오늘 저녁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나는 그를 잠깐 바라봤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강시우가 사라진 복도 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남겨진 채,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고, 몇몇은 벌써 다음 소문을 만들어내려는 듯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무도회에, 강시우와 함께.'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지훈과 윤소라를 다시 마주쳐야 한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머리를 짓눌렀다. 어느 쪽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거절하면 강시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수락하면, 그 자리에서 나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온갖 가능성으로 뒤엉켜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명확한 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결코 조용히 지나가지는 않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저녁까지, 나는 답을 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