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날 오후, 도서관 서가 사이를 걷다가 나는 우연히 옆 반 아이들의 대화를 들었다.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조용한 도서관에서는 그 정도로도 충분히 다 들렸다.
"그거 알아? 한지훈 공자님, 벌써 이서윤 영애랑 파혼 절차 밟는다던데."
"진짜? 근데 아직 정식으로 발표는 안 됐잖아."
"발표가 뭐가 중요해. 이미 다 알잖아. 백작가에서도 손 놓은 분위기라던데. 우리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후작 부인이 벌써 새 혼처 알아보고 다니신대."
"어머, 그럼 이서윤 영애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거야 모르지. 근데 6년이나 정혼했다가 파혼당하면… 앞으로 시집가기 힘들지 않을까?"
나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손끝이 종이 위에서 그대로 굳었다.
'백작가에서도 손을 놓았다고?'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나는 펼쳐놓은 책을 다시 보는 척했지만, 눈은 글자를 훑을 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이미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확인은 그저 확인일 뿐, 결과를 바꾸지는 못할 테니까.
그날 밤, 나는 방에 앉아 편지를 썼다. 몇 번을 고쳐 썼는지 모른다. 처음엔 상황을 묻는 문장을 썼다가 지웠고, 그다음엔 아무렇지 않은 듯 안부 인사만 늘어놓다가 그것도 지웠다. 결국 가장 짧고 담백한 문장 하나만 남겼다.
「한지훈 공자님과의 혼약에 관해, 아버님께서 아시는 바를 알고 싶습니다.」
답장은 이틀이 걸렸다.
그 이틀 동안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저녁을 먹었다. 다만 밤마다 편지가 오지 않았는지 하녀에게 몇 번씩 물었을 뿐이다.
답장은 짧았다.
「한 백작가에서 파혼을 언급한 건 사실이다. 정식 절차는 아직이나, 사실상 정리된 사안이라 보면 된다.」
딱 그뿐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도, 위로도 없었다.
나는 그 편지를 세 번 읽었다.
'사실상 정리된 사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육 년을 예비 며느리로 살았는데, 정리라는 말 한 줄로 끝이라니.
'그렇다면 나는 이제 뭐가 되는 걸까.'
그런 걸 생각해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편지를 다시 접어 서랍 깊은 곳에 넣었다.
다음 날 학원에 갔을 때, 나는 평소와 똑같이 인사를 하고 수업을 들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스쳤다가 재빨리 거두어지는 게 느껴졌다. 못 본 척하는 게 더 어색했다.
한지훈은 나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평소라면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였는데, 오늘은 아예 시선을 창밖에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을 지나 평소 앉던 자리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는 척, 필기구를 꺼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담임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이서윤 학생, 자리 배치 관련해서 잠깐 이야기할까요."
"자리 배치요?"
선생님은 잠시 종이를 뒤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한지훈 학생 쪽에서 요청이 들어와서요. 두 사람 자리를… 조금 떨어뜨리는 게 어떨까 하고."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이 상황이 불편한 듯 시선을 피했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걸 보니,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나름 고민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이서윤 학생이 원하지 않으면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저는 상관없습니다."
내 대답은 짧았다.
선생님은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예상보다 순조롭게 끝난 협상에 안심하는 사람처럼.
그 짧은 대화가 모든 걸 확정시켰다.
혼약자가 자리를 떨어뜨려달라고 요청했다는 건, 더 이상 나와 나란히 앉는 것조차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파혼은 이미 결정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소문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는 게, 적어도 내 쪽에서는 예의라고 생각했다.
자리를 옮긴 첫날, 새로 배정된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원래 그 자리 주인이 결석이었기 때문이다.
창가 쪽 자리였다. 햇빛이 유난히 잘 들어왔다. 먼지 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책상 위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혼자 앉아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창밖을 볼 수 있었으니까.
수업이 시작되기 전, 강시우가 그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강시우는 옆 반에서도 조용하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누구와도 깊게 어울리지 않았고,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빈자리를 찾아와 앉을 이유가 없었다.
"여기, 자리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을 펼쳤다.
책 표지는 낡았고, 모퉁이가 접혀 있었다. 여러 번 읽은 흔적이었다.
나는 그가 왜 하필 이 자리에 앉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묻는 게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혹시 이것도 누군가의 요청인가 싶은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곧 지워졌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수업 시간 내내 그는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펜을 쥔 손도, 시선도, 흐트러짐 없이 앞만 향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가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태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존재감만으로도 교실 안의 시선이 달라졌다.
아무도 나를 대놓고 수군거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쉬는 시간마다 슬쩍슬쩍 이쪽을 돌아보던 아이들도, 오늘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강시우가 있는 방향으로는 눈길조차 잘 주지 않았다.
그게 우연인지 아닌지, 나는 그때까진 알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창밖으로 지는 해가 그의 옆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그제야 처음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서윤 영애."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