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보, 왜 이렇게 다정해요?

2화

박수호는 서재로 향하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발걸음도 평소보다 반 박자씩 빨랐다. 십 년 동안 공작을 모신 몸이 이렇게 허둥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공작이 갑자기 존댓말을 쓰고, 딸을 보고도 누구냐고 물어보다니. 이건 감기몸살로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병이 나신 게 틀림없다.' 박수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어쩌면 머리를 부딪히셨을지도 모른다고, 걸어가는 동안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정작 강준서는 그런 걱정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는 창밖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 지붕이 즐비한 낯선 도시, 마차가 다니는 거리, 돌바닥 위로 튀는 말발굽 소리까지. 이 모든 것이 그가 알던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하늘빛조차 낯설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유난히 청량한 파란색이었다. '진짜 이세계란 말인가.' 강준서는 창틀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질감마저 생생했다. 이게 꿈이라면 지독하게 정교한 꿈이었다. 원룸에서 홀로 죽어간 마흔둘의 인생이 문득 떠올랐다.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형제는 없었다. 결혼도 하지 못한 채 회사와 집만 오가는 삶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고, 같은 자리에 앉아 야근을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걱정해줄 사람 하나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가장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외로웠지.' 짧은 인정이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무게를 이제야 정확히 재는 기분이었다. 마차 소리와 낯선 거리 풍경이, 오히려 그 무게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 부인의 방으로 안내받은 건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강준서는 그 인사를 받는 게 여전히 낯설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평생 없었으니까. 방문을 열자 은빛 머리의 여인이 창가에 앉아 있었다. 딸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 그러나 훨씬 길고 정갈하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서른을 넘겼다는데 얼핏 보면 십 대로 보일 만큼 젊은 얼굴이었다. 창을 넘어온 노란 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걸려 있었다. '이 사람이 부인이라고?' 강준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소설 속 삽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오셨어요, 공작님." 여인이 조심스레 일어나며 인사했다. 목소리에 긴장이 짙게 묻어 있었다. 허리를 굽히는 각도까지 정확했다. 오랜 세월 몸에 새겨진 몸짓이었다. "이세아 씨..." 강준서는 이름을 부르려다 존댓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이세아의 눈이 커졌다. 남편에게서 저런 어조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몇 초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녀가 겨우 물었다. "아뇨, 그냥." 강준서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어 얼버무렸다. '이 사람한테 내가 몸을 바꿔 들어왔다고 말하면 믿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소금을 뿌리며 쫓아낼지도 몰랐다. 대신 그는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하나였고, 옷장도 하나였다. 화장대 위에 놓인 물건들도 온통 여성의 것뿐이었다. 방 어디에도 남편의 물건이라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옷걸이 하나, 서류 한 장조차 없었다. "...혼자 지내십니까?" 강준서가 물었다. 이세아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스쳤다. 손끝이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 "공작님과는... 각방을 쓰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렸다. 강준서는 그 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알지 못했지만, 좋은 신호는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날 밤, 박수호가 서재로 야참을 들고 왔을 때, 강준서는 그를 붙잡고 물었다. 접시 위에는 따뜻한 차와 작은 빵이 놓여 있었다. 강준서는 빵 하나를 집어 들며 물었다. "부인이 나랑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박수호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접시를 내려놓는 손이 잠깐 멈췄다. "공작님, 정말 어디 다치신 겁니까?" 그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6년째입니다. 소은 아가씨가 태어난 것도 4년 전이고요." 박수호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기본적인 걸 잊었다면 큰일이라는 표정. "정략결혼이었어요?" 강준서가 계속 물었다. "...예." 박수호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조심스레 덧붙였다. "부인마님 가문이 몰락 직전이었을 때, 공작님 쪽에서 혼담을 넣으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부인마님은 그전부터 공작님을 흠모하셨습니다. 결혼 전부터요." "뭐라고요?" 강준서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빵을 씹던 입이 멈췄다. "공작님 눈에는 안 보이셨겠지만," 박수호가 이어 말했다. "부인마님은 6년 내내 공작님 눈치를 살피며 사셨습니다. 아침마다 서재 앞을 지나가시고, 공작님이 좋아하시는 차를 매번 준비하시고요." "정작 공작님은... 거의 눈길도 안 주셨지만." 박수호의 말투에 옅은 한숨이 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무게였다. 강준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6년간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한 채 한 사람을 지켜본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마음을 숨기는 일. 홀로 죽어간 자신의 삶과 어딘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한테 진 빚이 있구나.' 강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 어떤 빚인지는 몰라도, 갚아야 한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몸의 주인이 진 빚이지 자신이 진 빚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몸에 들어와 있는 이상 그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 "그런데 소은이는요." 강준서가 문득 물었다. "왜 나를 보고 그렇게 도망갔어요?" 박수호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마치 스위치를 내린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다정한 태도가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그건... 공작님도 아시는 부분입니다." 그가 애매하게 답했다. "내가 뭘 알아요?" 강준서가 재차 물었다. 이번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박수호는 대답 대신 야참 접시를 내려놓고 서둘러 서재를 빠져나갔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마치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목표인 사람처럼.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강준서는 텅 빈 서재에 홀로 남아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촛불이 흔들리며 벽에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내가 아는데 나만 모른다니.'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딸이 자신을 보고 도망친 이유, 아내가 각방을 쓰며 6년을 버틴 사정, 그리고 박수호가 그 순간만큼은 절대 입을 열지 않으려 했던 그 표정.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잘못은, 자신이 지금 당장 밝혀내야 할 문제라는 확신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강준서는 촛불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이 몸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풀어야 할 실타래가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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