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얌전한 변태 궁녀

4화

조심하자, 조심하자. 나는 그날부터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하루에도 백 번은 되뇌었다. 저하의 동선을 외우고 다니던 습관도 끊었고, 다과상을 나를 때는 눈을 아예 바닥에 고정한 채 걸었으며, 저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이 조금이라도 예상되면 미리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심지어는 저하의 옷자락 색깔만 눈에 들어와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아예 색깔 있는 것은 시야에 담지 않기로 다짐할 정도였다. 이게 회피 전략이라면 참 초라한 전략이지만, 목숨이 걸린 일 앞에서는 초라해도 상관없었다. 목숨보다 자존심이 중요한가? 아니지. 절대 아니지. 복도를 걸을 때는 아예 벽을 짚고 걸었다. 벽을 짚으면 방향이 헷갈릴 일도 없고, 혹시라도 누군가와 부딪히더라도 내가 먼저 넘어지지 않으니 좋았다. 물론 다른 나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그 눈초리 정도야 곤장 삼십 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이 정도쯤 눈총이야 얼마든지 받아주마. 일주일쯤 그렇게 지내면서 나는 스스로를 꽤 대단하다고 여겼다. 현조의 눈빛도 조금 덜 매서워진 것 같았고, 김 상궁도 더 이상 불러 세우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성공적인 위장 아닌가 싶어서 뿌듯하기까지 했다. 심지어는 밤에 이불을 덮으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이서윤아, 너 정말 잘하고 있다. 이대로만 가면 목숨 걱정 없이 궁 생활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거야. 착각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정도를 한참 넘어섰던 모양이다. 그런데 세상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흘러갈 리가 없었다. "이서윤, 오늘부터 동궁전 내실 시중을 맡아라." 김 상궁의 그 한마디에 나는 다과상을 든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는데, 다행히 상 위에 놓인 찻잔이 넘치지는 않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근육 반사였다. 내실 시중이라니. 그건 저하의 침소 바로 옆에서 세수 시중, 아침상 나르기, 서책 정리 같은 일을 도맡는 자리였고, 그야말로 저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업무였다. 회피 전략의 정반대편에 있는 자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가 아니라 아예 벼랑 끝에서 손 잡고 뛰어내리는 격이었다. "제, 제가 말씀이십니까." 나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썼다. "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다른 아이가 맡는 게 더 나을 듯한데." "경험이야 겪으면 쌓이는 것이지." 김 상궁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원래 그 자리를 맡던 아이가 갑자기 몸이 아파 물러나야 한다는구나. 그 아이가 너를 추천했다. 손이 야무지고 눈치가 빠르다고." "그, 그 아이가 누굽니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 시점에서 범인을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알아낸다고 뭘 어쩔 것도 아니지만.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김 상궁이 눈을 흘겼다. "괜한 걸 캐묻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 하여라."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속으로 절규했다. 대체 누가 나를 추천했다는 건지, 그 손이 야무지다는 평가가 지금 이 순간엔 저주처럼 들렸다. 야무진 손 필요 없으니 그냥 나를 좀 잊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하필 지금, 조심하기로 결심한 바로 이 시점에 저하와 가장 가까운 자리로 배정되다니, 이게 운명의 장난이 아니면 뭘까. 하늘이 나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저, 상궁마님."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매달렸다. "제가 손끝이 야물지 못하여 혹여 실수라도 하면 저하께 큰 결례가 될까 걱정이 되어서 그러합니다." "실수하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냐." 김 상궁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무자비했다. 이 궁궐에서 논리로 이겨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도록 하여라." 김 상궁은 더 이상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투로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피 전략을 세우자마자 이렇게 정면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걸 두고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게 궁궐이라는 데서 벌어지는 일이니 개연성 따위를 논할 처지도 아니었다. 궁궐 안에서는 개연성보다 권력이 먼저다. 그리고 나는 권력이 없다. 그러니 개연성 따위를 따질 처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슬프지만 정확한 결론이었다. 한편으로는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순전히 두려움만은 아니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저하와 매일 가까운 거리에서 지낸다는 사실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임을 알면서도 나를 설레게 하고 있었다. 이 몹쓸 마음이 또 고개를 든 거였다.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심장을 두드리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지. 심장이라는 게 이렇게 이중적으로 뛸 수 있는 물건이었나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계속 뒤척였다. 내실 시중이라는 건 곧 매일같이 저하의 눈앞에서 서성여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건 곧 매 순간이 함정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손끝이 스치는 일 하나로 곤장 삼십 대가 날아온다는 걸 이제는 뼈저리게 알고 있는 나였다. 이 자리를 맡는다는 건, 매일 그 함정을 밟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소리였다. 세숫물을 올리다가 손이 스칠 수도 있고, 서책을 정리하다가 눈이 마주칠 수도 있고, 아침상을 나르다가 그 어떤 사소한 실수로도 저하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함정이 도처에 깔려 있을 거라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위험한 자리인 만큼,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저하를 더 가까이서, 더 오래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 저하의 아침 표정을 볼 수 있고, 서책을 넘기는 손끝을 볼 수 있고, 하루 중 가장 무방비한 순간의 저하를 볼 수 있다는 것. 나는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스스로가 정말 구제불능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이 위험한데 좋아하고 있다니, 이게 사랑인지 병인지 이제는 구분도 안 됐다. 아니, 어쩌면 이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병일지도 몰랐다. 병명은 알겠는데 치료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불을 걷어차며 몇 번이나 몸을 뒤집었다.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하나, 어떻게 하면 목숨은 부지하면서도 이 몹쓸 마음도 다스릴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들을 밤새 되풀이하다가, 결국 나는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결국 결심을 굳혔다. 이 자리를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조심하며 버텨보는 수밖에 없었다. 손끝 하나 저하께 닿지 않도록, 눈길 하나 오래 두지 않도록, 숨소리조차 조심하면서 그렁저렁 버텨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위험하다 싶으면, 현조에게 직접 부탁해서 다른 자리로 옮겨달라고 청해보는 것도 방법이었다. 현조라면 나인들 사정에 조금이라도 힘을 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소한 내 사정을 들어줄 정도의 인정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는지는, 그날 오후 현조를 찾아가서야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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