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날 오후 김 상궁이 나를 불러 세운 건 뜻밖의 일이었다. 김 상궁은 동궁전 궁녀들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는데, 평소엔 나 같은 말단에게 직접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저 높으신 분이 왜 나 같은 걸 상대로 시간을 낭비하시나, 하고 늘 안심하고 살았는데. 오늘은 그 안심이 완전히 빗나갔다.
"이서윤아, 너 요즘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게냐." 김 상궁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현조 내관님이 벌써 두 번이나 네 얘기를 하시더구나."
두 번이나.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저 인간이 나에 대해 상궁한테까지 보고를 한다는 건, 그냥 눈으로 흘겨보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한 번이면 우연이라고 우길 수 있었을 텐데, 두 번이면 이미 패턴으로 잡혔다는 소리다. 나 같은 인간을 데이터로 취급해서 상궁에게 브리핑까지 올리는 그 성실함, 참으로 존경스럽고도 재수 없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이슬 맞은 강아지처럼 눈을 깜빡였지만, 속으로는 온갖 시나리오가 미친 듯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설마 다과 시간에 정자 근처에서 서성인 걸 본 건가, 아니면 산책길에서 괜히 앞질러 걸었던 걸 본 건가. 하나씩 따지자면 셀 게 너무 많아서 정확히 어느 대목에서 걸렸는지조차 가늠이 안 됐다.
"잘못이야 네가 더 잘 알겠지." 김 상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현조 내관님이 그 자리에 계신 이유를 모르는 게냐? 저하의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씻기시고, 침소를 정돈하는 것까지 그 어른 손을 거치는 게다. 어째서 그런 자리를 그분이 맡고 있는지 아느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궁에는 왕세자 저하께 손을 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딱 두 종류밖에 없었다. 하나는 정통 후궁, 다른 하나는 어릴 때부터 저하를 모신 특별한 자격을 가진 내관. 박현조는 후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저하와 함께 자란 몇 안 되는 인물이었고, 그 신뢰가 곧 특권으로 이어져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게 이 궁 안의 공공연한 얘기였다.
생각해보면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현조 내관님은 저하의 그림자시다, 현조 내관님 눈 밖에 나면 궁 생활 끝이다, 하는 식의 경고를 선배 궁녀들에게서 수없이 주워들었으면서도 나는 그걸 그냥 흔한 텃세 정보쯤으로만 흘려들었다. 실제로 겪어보니 그게 텃세가 아니라 생존 지침이었다는 걸 이제야 실감하는 중이었다.
"그분이 아니면 누구도 저하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다." 김 상궁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그분은 이 궁 안에서 궁녀들의 동선을 가장 촘촘히 알고 있는 사람이야. 누가 어디서 무슨 눈빛으로 저하를 바라보는지, 누가 저하의 동선을 외우고 다니는지, 그 어른이 다 파악하고 계신다는 걸 명심하렴."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설마. 정말 그 인간이 내 동선까지 다 알고 있단 말인가? 나는 다과 시간에 저하가 어느 정자에 앉는지, 목욕 후 산책을 어느 길로 하시는지까지 다 외워두고 있었는데, 그게 다 감시망 안에서 놀아난 거였다는 소리인가. 심지어 어제는 산책로 갈림길에서 일부러 걸음을 늦춰서 저하와 눈이 마주치는 각도를 계산했었는데, 그 순간까지 누가 지켜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머릿속으로 지난 며칠을 되짚어봤다. 다과상을 나르며 괜히 정자 뒤편에서 시간을 끈 것, 세답방에 가는 길을 일부러 저하의 산책로 쪽으로 돌린 것, 목욕 시중을 드는 궁녀들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복도에서 괜히 걸레질을 하고 있었던 것. 하나하나 떠올릴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걸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면 나는 그냥 궁녀가 아니라 스토커로 분류될 판이었다.
"그럼 만약에."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태연하게 유지하며 물었다. "만약에 궁녀가 저하께 실수로 손을 대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찌 됩니까."
내가 이 질문을 왜 던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궁금해서, 라고 하기엔 너무 구체적인 질문이었고, 위기감을 느껴서, 라고 하기엔 이미 늦은 질문이었다. 아마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대답을 미리 알아둬야 나중에 대비할 수 있다는 얄미운 계산이 작동했던 것 같다.
김 상궁의 표정이 굳었다. "실수든 고의든 상관없다. 지난해 세답방 궁녀 하나가 저하의 옷깃을 여며드리다 손끝이 스친 일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곤장 삼십 대를 맞고 궁 밖으로 쫓겨났느니라. 그것도 저하께서 직접 선처를 요청하셔서 그 정도로 끝난 거고, 원래대로라면 사약을 받을 수도 있는 죄다."
곤장 삼십 대. 사약. 나는 그 단어들을 듣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옷깃 한 번 스친 걸로 곤장 삼십 대라니, 그럼 내가 지난 며칠 동선을 계산하며 저지른 짓들은 형량으로 치면 대체 몇 대가 나오는 걸까. 손끝이 스친 것도 아니고 그냥 눈으로 좀 오래 바라본 것뿐인데, 그것도 죄로 치면 곤장 열 대는 나올 것 같아서 손발이 저릴 정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저하와의 접촉을, 마치 언젠가 이뤄질 로맨스의 한 장면처럼 상상하며 살아왔는데, 실제로 그게 벌어지면 나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실감했다. 이 궁이라는 곳이 그냥 낭만적인 배경이 아니라,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목이 잘려나가는 살벌한 무대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드라마에서는 다들 손목 한 번 잡히고 설레하던데, 여기서는 손목 잡히면 그날로 관 짜는 소리가 울릴 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겨우 그 말만 내뱉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어딘가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김 상궁은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발이 바닥에 딱 붙은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온갖 계산이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현조가 내 동선을 파악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해왔던 걸까. 그리고 저 인간이 굳이 상궁에게까지 보고를 한 이유는 뭘까. 단순한 훈계 목적일까, 아니면 정말로 나를 처소에서 내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
혹시 저하께 직접 말씀드리기 전에 상궁을 통해 먼저 경고를 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건 그나마 배려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인간의 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깜깜무소식이었다.
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앞으로는 훨씬 조심해야 한다는 것. 동선을 좀 더 흩어놓고, 시선을 좀 더 짧게 던지고, 발걸음도 평범한 궁녀처럼 무심하게 옮겨야 한다는 것. 이 마음을 접을 생각은 없지만, 목숨은 부지하고 싶었으니까. 마음이야 접든 안 접든 내 맘대로지만, 목은 한 번 떨어지면 다시 붙일 수 없으니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그렇게 다짐을 되새기며 처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또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오며 동선을 기록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 텅 빈 복도가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또 다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이 내 다짐을 순식간에 무너뜨릴 줄은, 그때는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