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물동이를 이고 나르는 이 손이 언젠가 세자 저하의 옷고름을 만지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열 번은 하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부패한 궁녀. 스스로 붙인 별명치고는 꽤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왕세자 이헌 저하께 마음을 빼앗긴 지가 벌써 두 해째, 그 마음이 조금도 삭지 않고 오히려 곰삭아서 냄새까지 나는 걸 보면 이건 사랑이 아니라 발효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물동이는 무거웠으며 어깨는 진작에 감각을 잃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몸뚱이는 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발이 얼어붙든 손이 갈라지든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였고, 진짜 문제는 오늘도 저하를 볼 수 있을까, 못 볼까, 하는 그 하나뿐이었다. 이런 걸 두고 우선순위가 잘못됐다고 하는 건가. 알고 있지만 고칠 생각은 없다.
동궁전 뒤뜰을 지나던 참이었는데, 저 멀리서 걸어오시는 저하의 옥색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보는 순간 나는 이미 숨을 참고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처럼 짙푸른 눈동자, 저런 걸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의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물동이를 안은 채 길 가장자리로 몸을 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이미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는데, 이건 부정맥이 아니라 그냥 사랑앓이가 만성이 된 증거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됐다.
궁녀는 왕세자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게 이 궁의 법도였고, 하물며 손끝 한 번 스치는 것도 상상해선 안 될 일이었다. 정통 후궁이 아닌 이상 누구도 저 몸에 닿을 수 없다는 그 규율이, 나는 매일 아침 이를 갈면서도 지켜야 했다. 대체 누가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 만든 놈 얼굴 한번 보고 싶다. 아마 잘생긴 세자 곁에 자기 딸이라도 하나 앉혀놓으려는 속셈이었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고개는 어김없이 바닥을 향해 있었다. 이게 몸에 새겨진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저하의 소맷자락이 훅 펄럭이며 내 팔뚝을 스칠 듯 다가왔고, 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결국 스치지는 않았다. 아깝다. 아니, 아까워하면 안 되는 거잖아, 이서윤. 나는 속으로 자신을 다그치면서도 이미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게 바로 정신줄이 나갔다는 증거 아닐까 싶었다. 물동이 안의 물이 출렁이며 손목에 튀었는데도 뜨겁게 느껴졌으니, 이건 그냥 물이 아니라 감정의 파도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저하는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 같은 말단 궁녀가 저하의 시야에 걸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그 뒷모습을, 정확히는 걸음마다 살랑이는 도포 뒷자락을 눈으로 좇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이 정도면 대박이다. 스칠 뻔한 것만으로도 하루치 행복을 다 채운 기분이었다. 남들이 보면 미친 여자라고 하겠지만, 이 정도 행복을 이렇게 값싸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또 어디 있나 싶어서 오히려 뿌듯했다.
그 행복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서윤."
등 뒤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날아왔고, 나는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 알아채는 순간 물동이를 놓칠 뻔했다. 박현조. 이 동궁전에서 가장 출중하다는, 왕세자 저하의 유일한 근접 시중을 맡은 그 내관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였지만 그 위엄만큼은 상궁들도 함부로 못 건드릴 정도였고, 눈빛 하나로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 재주 하나로 이 넓은 동궁전을 좌지우지하는 걸 보면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내관님, 부르셨습니까."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를 냈지만 속으로는 이미 욕이 한 사발 튀어나오고 있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하필 지금. 조금만 늦게 나타났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어쩜 이렇게 타이밍을 맞춰서 나타나는지, 이 인간한테 예지력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방금 저하께서 지나가실 적에 네 눈이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 내가 다 지켜봤느니라." 현조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개를 숙이라는 법도를 그리도 힘들어하는 게냐?"
"아, 아닙니다. 그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잠시 고개를 들었을 뿐입니다."
뻔뻔하게도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런 걸 잘하는 걸 보면 이 궁에서 몇 년 버틴 게 헛되지는 않았구나 싶어서 이상하게 자랑스러웠다. 얼굴은 태연했지만 등에서는 이미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이걸 보고도 안 속으면 저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 관상학자다.
"바람 탓이라, 그것 참 편리한 변명이구나." 현조는 코웃음을 쳤지만 더 다그치지는 않았고, 대신 나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다시 한번 그런 눈으로 저하를 바라보다 걸리면, 내 너를 다른 처소로 보내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명심해라."
그 말에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다른 처소로 보내는 것보다 더한 게 뭐가 있다는 건지 상상만으로도 간이 쪼그라들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속으로는 이 자식이 뭘 안다고 저렇게 잘난 척인가 싶었지만, 어쩌겠나. 이 궁 안에서 저하 곁에 설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저 인간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열받게 했다. 나는 몸도 못 대는데 저 인간은 매일 저하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다는 게, 이게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일이 아니면 뭘까. 아침마다 세숫물을 떠다 바치고, 밤마다 잠자리 정돈을 하고, 저하의 숨소리까지 가장 가까이서 듣는 게 저 남자라니. 신은 나에게 얼굴도 안 주고 자리도 안 주고 그저 물동이만 쥐여준 게 확실하다.
현조가 몸을 돌려 저하가 가신 방향으로 걸어가는 걸 보며 나는 물동이를 다시 고쳐 들었다. 발걸음이 흔들려서 물이 또 튀었는데, 이번엔 손목이 아니라 발끝에 떨어졌다. 차가운 감각이 정신을 조금은 깨워주긴 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저하의 뒷모습으로 가득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시작하는구나. 그런데 문득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방금 현조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던 것 같았는데, 그게 단순히 훈계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훈계할 때조차도 어딘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 눈빛, 나를 보고는 있지만 나를 넘어서 다른 무언가를 재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평소라면 이즈음에서 끝났을 훈계가, 오늘은 유난히 길었다. 목소리에도 뭔가 조바심 같은 게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저하께서 뭔가 말씀을 하신 걸까. 아니면 다른 상궁이 나에 대해 뭔가 고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쳤지만 그중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물동이를 안고 처소로 걸어가는 내내 나는 등 뒤가 뜨끈한 걸 느꼈다.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그 느낌, 착각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선명했다.
뭔가 달라졌다. 아니, 뭔가 달라지려는 참이었다. 나는 그걸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