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깊은 밤, 강서윤의 처소에는 촛불 하나만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불빛은 바람도 없는데 이따금 흔들렸는데, 마치 방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서성이며 지나가는 듯했다. 서윤은 그 흔들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펼쳐놓은 채 붓을 움직였다. 손끝은 지친 기색 없이 종이 위를 오갔으나, 그 움직임 아래에는 절박함이 깔려 있었다.
시전 상인들의 세제를 낮추고 소작농의 부담을 줄이는 방안, 그것이 그녀가 지난 몇 달간 밤을 새워가며 다듬어온 개혁안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그녀의 귀에 들어와 있었고, 그 소식들은 하나같이 서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대신들의 눈초리, 문서를 훑어보다 슬며시 미간을 좁히는 그 표정들이 눈앞에 선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서윤은 붓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 이 년간 이헌을 도와 국정을 개혁해온 시간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눈꺼풀 안쪽에서 되풀이해 돌아갔다.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의 그녀는,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 앞에서도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오히려 그 미천한 태생이 자신의 이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뿌리라고 믿었으며, 그 믿음 하나로 밤낮없이 문서와 씨름해왔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 믿음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서윤은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도자기의 겉면에 실금이 번지듯,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헌의 눈빛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서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함께 조정 회의를 마치고 나올 때, 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회의실을 나서며 자연스레 그녀의 걸음에 맞춰 걷고, 오늘 논의된 안건에 대해 소소한 감상을 나누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 어떤 말도 없이 앞서 걸어가버리는 날이 늘어갔다. 국정을 논할 때조차 그녀의 의견에 형식적으로만 고개를 끄덕이는 날이 늘어갔고, 그 형식적인 고갯짓 뒤에 감춰진 무관심을 서윤은 매번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처음에는 국사의 부담 때문이라 여겼다. 세자의 자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져야 하는 자리인지 서윤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냉담함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여자의 직감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피로나 부담에서 오는 무심함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태도였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쪽에 놓인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걸음이 느렸는데, 마치 거울 속에서 마주하게 될 자신의 얼굴을 미리 각오하려는 듯했다. 청동으로 된 오래된 거울이었다. 어머니가 물려준 유일한 세간이었고, 그 표면은 이미 여러 군데 흐릿하게 흠집이 나 있었다. 촛불의 흔들림 때문인지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너는 정말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니.
그 물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올 때마다, 서윤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밀어내곤 했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신념으로, 노력으로, 밤을 새워 문서를 파고드는 성실함으로 그 물음을 짓눌러왔다. 그러나 거울 속 자신의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독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물 위에 뜬 나뭇잎처럼, 붙잡을 곳 없이 흔들리며 이리저리 떠도는 눈빛이었다.
명문가의 규수들이 갖춘 화려한 자태나 태생적인 여유로움을, 서윤은 단 한 번도 지녀본 적이 없었다. 값비싼 비단으로 지은 옷을 걸쳐도 몸에 붙지 않는 어색함, 궁중 예법을 익힐 때마다 느껴지는 미묘한 이질감. 그런 것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그녀의 몸짓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대신 그녀에게는 밤낮없이 서류를 파고들고, 백성들의 삶을 바꾸겠다는 신념 하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념만으로 이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서윤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 밤샘으로 그늘진 눈두덩, 그리고 그 아래 감춰진 불안. 손끝이 뺨을 스치는 순간, 그녀는 문득 자신의 피부가 얼마나 거칠어졌는지를 깨달았다. 예전에는 이런 것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는데.
명문가 출신인 유채린이 궁에 들어온 뒤로, 이헌의 곁에서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서윤은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채린의 웃음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그녀가 걸을 때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도 어딘가 우아하게 들렸다. 그 앞에서 서윤은 자신이 마치 낡고 초라한 그림자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것이 질투인지, 아니면 자신이 갖지 못한 무언가에 대한 오래된 갈증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감정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안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규수님, 궁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서윤은 흠칫 놀라며 거울에서 시선을 떼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순간 굳었으나, 곧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가 내민 서신을 받아 촛불 아래로 가져가 펼치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신에는 왕세자빈 책봉을 위한 공개 연회의 일정이 적혀 있었다. 사흘 뒤, 궁의 모든 대신과 명문가의 자제들이 참석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왕세자빈 후보로서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야 했다.
지금까지는 조정의 회의실 안에서 이헌의 조력자로서 존재했을 뿐이었다. 문서와 정책 속에 숨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되 결코 화려한 무대의 중심에 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토록 화려한 사교의 무대에 정면으로 나서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 무대 위에서 그녀는 유채린을 비롯한 명문가 규수들과 나란히 서서 평가받아야 했다.
서신을 쥔 손끝이 종이의 결을 따라 미세하게 구겨졌다.
그녀는 서신을 내려놓고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흔들리던 눈동자 대신, 서서히 결기가 차오르는 눈빛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그 결심이 마음속에서 단단해지는 순간, 시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망설임이 섞여 있었는데, 서윤은 그 망설임의 결이 심상치 않음을 곧 알아챘다.
"그런데 규수님, 요즘 궁 안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사옵니다."
서윤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소문이라니."
시녀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이었다.
"개혁안 문서가 궁 밖으로 유출되었다는데, 그 배후로 규수님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 말이 방 안에 떨어지는 순간,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 흔들림을 따라 서윤의 표정 위로 짙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비워지는 듯했다. 개혁안 문서라면, 자신이 밤을 새워가며 다듬어온 그 문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궁 밖으로 유출되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소리였거니와, 그 배후로 자신의 이름이 지목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인가.
서윤은 서신을 쥔 손을 천천히 내리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소문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아느냐."
시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는 저도 자세히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요 며칠 사이 대신들 사이에서 은밀히 도는 이야기라, 규수님께서도 알고 계셔야 할 듯하여 감히 아뢰었사옵니다."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 조그마한 불꽃이 마치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흘 후의 연회, 그리고 지금 막 들려온 소문. 두 가지가 동시에 그녀를 향해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을, 서윤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