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편전 안뜰에는 이른 새벽부터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창호지를 투과한 빛이 마룻바닥에 희미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으나, 그 빛조차 이 방의 냉기를 데우지는 못하는 듯했다. 처마 밑으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는 아직 겨울의 잔재를 품고 있었고, 그 서늘함이 방 안 사람들의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저마다의 등줄기를 조용히 조여왔다.
왕비 조혜란은 상석에 단정히 앉아 손끝으로 찻잔의 테두리를 느리게 문질렀고,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방 안의 모든 숨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녀의 옷자락은 짙은 남색으로, 오래된 아마 빛깔을 닮아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무채색의 위압감을 자아냈다. 손가락이 자기 앞을 지나갈 때마다 도자기의 표면이 나지막이 마찰음을 냈고,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알리는 신호처럼 방 안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으로 방 안을 한 바퀴 훑었다. 상선을 지나, 궁녀 유채린을 지나, 마지막으로 박도겸의 얼굴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그 잠깐의 정지가 방 안의 공기를 더욱 팽팽하게 당기는 듯했다.
"개혁안 초안이 궁 밖으로 흘러나갔다는 게, 그러니까 확실한 사실이란 말이지." 조혜란이 낮게 물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이미 결론을 내린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맞은편에 선 상선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을 더듬었고,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상선의 이마에는 벌써부터 식은땀이 배어 있었는데, 그것이 새벽의 냉기 때문인지, 아니면 왕비의 시선 때문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렇습니다, 왕비 전하. 개혁안 초안이 시전 상인들의 회합에서 낭독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 아직 어느 경로로 유출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상선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잦아들었다. 마치 말을 끝맺는 순간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그는 마지막 음절을 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확실치 않다." 조혜란이 그 말을 그대로 되받아 읊자, 상선은 그 억양 속에 담긴 냉소를 느끼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참아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방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인물에게 시선을 옮겼다. 궁녀 유채린이었다.
유채린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었는데, 그 자세가 겸손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계산된 듯 단정했다. 옷고름을 매만지는 손끝조차 흐트러짐 없이 정갈해서, 이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몇 번이고 되새겼을 법한 태도였다. 조혜란이 손짓하자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고, 그 걸음걸이는 뱀이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이어졌다.
"채린이 너는 그날 서윤의 처소에 드나들었다고 들었다. 본 것이 있으면 그대로 말하여라."
유채린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가, 마치 말하기를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 주저함마저 지나치게 매끄러워서, 오래전에 연습해둔 몸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그날 밤 강 규수의 처소에서 문서를 정리하는 소리를 들었사옵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무언가를 옮겨 적는 듯한 필기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사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규수께서 시전 쪽 사람을 불러들여 무언가를 건네는 것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보퉁이 같은 것을 손에서 손으로 넘기는 모양이었는데, 그 뒤로 규수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몹시 굳어 있었사옵니다."
방 안의 정적이 한층 무겁게 내려앉았다. 침묵이 방을 가득 채우는 것을 조혜란은 즐기듯 잠시 두었다가,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 그 미소는 웃음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차가웠고, 오히려 얇은 얼음장에 금이 가는 소리를 닮아 있었다.
"우연히, 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재판이 끝난 자의 확신이 실려 있었다. "그 규수가 늘 백성을 위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결국 궁의 기밀을 저잣거리에 팔아넘긴 셈이군. 참으로 갈고닦은 언변이었지. 저잣거리의 상인들 앞에서 백성의 살림을 걱정한다며 눈물까지 보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그 뒤에서는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니."
방 안에 서 있던 박도겸은 그 말을 들으며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지만, 관자놀이 아래로 미세하게 힘줄이 곤두서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판이 짜이는구나.* 그의 속에서 냉소가 스쳤다. *증인의 말 한마디로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자리인데, 저 여인은 조금도 떨림이 없어.*
"전하, 아직 정황일 뿐입니다." 박도겸이 낮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사무적이고 건조한 어조였지만, 그 말투 뒤에 숨은 조급함을 조혜란은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채린이의 증언은 소리와 정황을 엮은 것일 뿐, 문서를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강 규수가 시전 사람에게 건넨 것이 개혁안 초안이라는 확증은 아직 없사옵니다."
"정황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박 경." 그녀가 찻잔을 다시 들며 말했다. 손가락 사이로 김이 옅게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졌다. "강서윤이 이번 개혁안으로 저잣거리 상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왕세자의 마음까지 흔들어 조정을 뒤엎으려 한다면, 그보다 더한 정황이 또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자네가 굳이 확증을 요구하는 것이, 혹여 다른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겠지."
그 말에 박도겸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졌으나, 그는 곧바로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다만 훗날 이 일이 뒤집힐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뒤집힐 여지." 조혜란이 그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 "그래, 그런 것은 남기지 않는 게 좋겠지. 그러니 자네가 확실하게 만들어주게."
그 말에 방 안의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창밖에서 새 한 마리가 낮게 울며 지나갔고, 그 소리가 방 안의 무거운 정적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상선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고, 유채린은 여전히 두 손을 모은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 속에서 옅은 안도의 빛이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조혜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옷자락을 정리했는데, 그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짜인 무대의 한 장면처럼 매끄러웠다. 남색 치맛자락이 마룻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방 안에 잔잔히 퍼졌고, 그 소리마저도 계산된 것처럼 정확한 박자를 지니고 있었다.
"박 경." 그녀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자네가 이 일을 맡아주게. 증거를 확실히 하는 일 말이야."
박도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으나, 그것이 분노인지 오래된 회한인지는 방 안의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빛이 그의 얼굴 반쪽을 비추었고, 나머지 반쪽은 그늘에 잠긴 채 남아 있어서,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표정이 한 얼굴에 동시에 걸려 있는 듯 보였다.
*증거를 확실히 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 방 안의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없는 증거라면 만들어내라는 뜻이겠지. 그것이 이 궁의 방식이니까.*
그는 다만 고개를 숙이며 짧게 답했을 뿐이었다.
"명 받겠사옵니다."
그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는 이미 이 심문이 시작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조혜란은 그의 대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렸고, 그 뒷모습은 방 안의 빛을 등진 채 서서히 문가로 향했다. 옷자락이 마지막으로 마룻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났을 때, 방 안에는 오직 정적만이 남았다.
유채린은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박도겸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짧은 순간이지만 묘한 기색이 스쳤는데, 그것이 동조를 구하는 눈빛인지, 아니면 자신이 이미 한 배를 탄 자임을 확인하려는 눈빛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박도겸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은 채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그는 잠시 멈춰 섰다. 등 뒤로 닫히는 문의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고, 그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강서윤.*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끝이, 옷소매 아래에서 아주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어 아무도 보지 못했다.
새벽빛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으나, 편전 안뜰의 냉기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냉기 속에서, 누군가의 운명이 이미 정해진 판 위에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