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명 영주의 두 얼굴

4화

출발하는 날 새벽, 마당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배웅이랍시고 나온 사람 하나 없이, 짐 몇 개만 덜렁 마차에 실렸다. 유모조차 못 나왔다. 아버지 명이라고 했다. 딸 하나 시집보내는데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사람을 차단할 일인가 싶었는데, 뭐, 이 집안 사정 뻔한 거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한 번 돌아봤다. 불 꺼진 창문들, 인기척 없는 마당. 이 집에서 열여덟 년을 살았는데 떠나는 순간 아무도 없다는 게, 뭐랄까,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겪으니 속이 좀 쓰라렸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울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이 집에 정 붙일 일이 뭐가 있었나. 마차는 검었다. 칠이 벗겨진 데 없이 깔끔한 검은 마차였는데, 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시집가는 딸한테 이런 마차를 내줄 정성은 있었나 보다. 마부는 처음부터 말이 없었다. 등이 곧고 눈빛이 매서운 남자였다. 마부치고는 자세가 너무 반듯했다. 채찍을 쥔 손도, 고삐를 잡는 손목도, 어딘가 훈련받은 티가 났다. 청류령 사람이라기엔 옷차림도 이상하게 격식이 있었다. 소매 끝에 수놓인 무늬 하나까지 신경 쓴 흔적이 보였다. 나는 얼마 안 가 그가 그냥 청류령 소속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저기요." "···말씀하십시오." 목소리도 낮고 절제돼 있었다. 이건 뭐, 마부가 아니라 무슨 호위 무사 면접 보는 줄. "당신, 청류령 사람 맞아요?" 마부가 잠시 멈칫했다. 등이 살짝 굳는 게 보였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궁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궁. 나는 그 한마디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국왕이 이 혼사에 직접 관여했다는 소문이 헛말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그냥 변방 영주한테 시집가는 딸년 하나 딸려 보내는 데 궁에서 사람을 붙인다? 이게 정상적인 혼사면 나도 이 세계 관습 다 새로 배워야 한다. "국왕 전하께서 왜 저 같은 사람 하나 시집가는 데 사람을 보내십니까." "그건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딱 잘라 말하는 태도에 더 물어봐도 소용없겠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더 찔러봤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부분은 제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앵무새냐. 다만 이 여정이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판 위에 놓여 있다는 감은 확실히 들었다. 시집 한 번 가는 게 이렇게 정치적인 무게를 가질 일인가. 나 진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첫날은 그냥 산길이 이어졌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이 이리저리 쏠렸는데, 나는 그게 오히려 반가웠다. 아무 생각 없이 몸의 불편함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엉덩이 아프다, 어깨 배긴다, 이런 생각만 하고 있으면 적어도 앞날에 대한 불안은 잠깐 밀어낼 수 있었다. 창밖으로는 온통 산이었다. 초록이 짙은 산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다가, 해가 기울 무렵엔 그 초록이 붉게 물들었다. 예쁘긴 한데 그걸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마차 안에서 대충 말린 고기랑 딱딱한 떡 몇 개로 끼니를 때우면서, 나는 속으로 캠핑 가서 이런 음식 먹으면 낭만적이겠다 싶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서럽다는 생각만 했다. 이틀째 저녁, 국경 근처 작은 객잔에서 머물게 됐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건물이었는데 생각보다 손질이 잘 돼 있었다. 문틀도 삐걱거리지 않았고, 방에 들어가니 이불도 깨끗했다. 국경 변방 객잔이라기엔 관리가 지나치게 잘 돼 있어서 나는 또 한 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청류령 소속 사람을 만났다. 여인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더 있어 보였고, 옷차림이 화려하지 않았지만 태도는 이상하게 반듯했다. 걸음걸이도, 인사하는 자세도, 딱 절도 있게 각 잡힌 느낌. "아가씨, 소인은 여진이라 합니다. 청류령에서 아가씨를 마중하러 왔습니다." "청류령 사람이 여기까지 나왔다고요." 국경까지 마중을 보낸다니. 보통 이런 건 영지 안에 들어와서야 하는 거 아닌가. "영주님 명입니다." 영주님. 그 단어가 나오자 나는 저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소문 속의 그 이름, 그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실체를 가지고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사람 피를 마신다는 소문, 손에 걸리는 건 다 부순다는 소문, 청류령을 지나던 상인들이 하나둘 사라졌다는 소문. 그 온갖 소문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여진이라는 여인은 내 표정을 보더니 살짝 웃었다.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들은 얘기가 있어서요." "도성에 떠도는 소문 말씀이시죠. 그거 다 헛소리입니다." 다 헛소리. 말은 시원하게 하는데,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세상에 헛소리라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일수록 뒤에 뭔가 숨기고 있더라, 이게 내 경험상 법칙이었다.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가서 보면 알겠죠." "가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여진은 그렇게 말하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빠르고 정확했다. 짐 하나 옮기는 동작에도 낭비가 없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해칠 의도가 없어 보였다.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밤 여진이 가져온 저녁상은 놀랍게도 정갈했다. 흔한 여행 음식이 아니라 제대로 간이 맞은 국과 반찬이었다. 국물은 깊고 짜지 않았고, 나물은 물기 하나 없이 조미가 균일했다. 이거, 어디 편의점 도시락이랑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인데. "이거 청류령에서 준비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영주님께서 아가씨 입맛까지 신경 쓰라 하셨습니다." 입맛까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헛웃음이 났다. 사람 피와 살을 먹는다는 소문이 도는 자가, 새로 시집오는 아내의 입맛까지 챙긴다니. 이거 뭔가 앞뒤가 안 맞잖아. 소문대로면 나를 산 채로 씹어먹을 사람이 국 간을 걱정한다고? "영주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여진의 표정이 그때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눈매가 살짝 좁아지고,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옅어졌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직접 뵈시면 아실 겁니다." 그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좋다는 것도 아닌, 그냥 직접 확인하라는 말.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여진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폈지만, 그녀는 이미 표정을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였다. 프로답네, 진짜. 다음 날 아침,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여진이 함께 타면서 청류령까지 남은 거리와 지형을 설명해줬는데, 그 설명 중간중간에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이쯤 지나면 곡물 창고가 나옵니다. 지난달 도적떼가 노려서 순찰을 강화했는데, 이제는 다 정리됐습니다." "국경 마을들은 치안이 어떤가요." "작은 다툼이야 있지만 큰 사건은 거의 없습니다. 순찰대가 매일 돕니다." 국경 근처 마을들의 치안, 곡물 창고의 위치, 심지어 최근 있었던 도적 소탕 이야기까지. 변방의 무법지대라는 소문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나는 도성에서 들었던 얘기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청류령은 법도 안 통하는 땅이라고, 거기 영주는 자기 마음대로 사람 목을 친다고, 그런 땅에 곡물 창고를 지키는 순찰대가 매일 돈다고? "거기, 소문처럼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닌가 보네요." "위험하냐 안 하냐는 누구 기준이냐에 따라 다르죠." 여진이 웃으며 답했는데, 그 웃음 뒤에 뭔가 더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몇 가지를 더 캐물어봤지만 여진은 딱 필요한 만큼만 대답하고 그 이상은 넘어가지 않았다. 마치 정해진 대본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차는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고, 나는 창밖으로 점점 낯선 풍경이 펼쳐지는 걸 바라보며 이 여정의 끝에 뭐가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산세는 점점 험해지고 나무는 점점 굵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길가에 사람 흔적도 뜸해졌다. 마부도, 여진도, 갈수록 말수가 줄었다. 마치 청류령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뭔가를 더 조심스러워하는 것처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혼자 생각했다. 소문이 다 헛소리라면, 왜 이렇게 다들 말을 아끼는 걸까. 왜 궁에서 사람을 붙이고, 왜 국경까지 마중을 나오고, 왜 저녁상 하나까지 신경 쓰는 걸까. 뭔가 크게 어긋나 있었다. 어느 쪽이 어긋난 건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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