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명 영주의 두 얼굴

2화

본가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나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녀가 들어오지도 않고 그냥 문 앞에서 용건만 던지고 갔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버님이 부르십니다." 목소리도 낯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하며 조심스레 커튼을 걷던 그 시녀였다. 오늘은 문틈으로 말을 던지고 발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이불 속에서 잠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 이게 그 유명한 눈치 빠른 하인들이구나. 배 위에서 물이 새는 걸 제일 먼저 아는 게 쥐새끼라던데, 이 집 하인들도 딱 그 짝이었다.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옷만 겨우 걸치고 서재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마주친 하인 둘이 나를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숙이는 척만 했다. 눈은 이미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 미묘한 태도 변화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재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서류를 뒤적이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도현. 대운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공작. 딸을 왕세자비로 만들려고 이십 년을 계획한 사람. 그 계획이 하룻밤에 무너졌으니 지금 기분이 어떨지는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기다렸다. 아버지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사람은 원래 이랬다. 딸이 들어와도 인사보다 먼저 서류가 있었다. 어릴 때는 그게 그렇게 서러웠는데, 이젠 그냥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제 일은 들었다." "들으셨으면 아시겠네요, 제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걸." "억울하고 아니고가 지금 중요하냐."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걱정 따위는 없었다. 계산만 있었다. 서류 넘기던 손도 그때야 멈췄다. "공작가의 체면이 이 지경이 됐는데 너는 억울함 타령이나 하고 있구나." "제가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조용히 지내라. 새로운 자리가 정해질 때까지." 새로운 자리.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이 남자가 이미 다음 판을 짜고 있다는 걸 알았다. 딸의 파혼 소식보다 딸을 어디 팔아넘길지가 먼저 계산되는 집.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정면으로 확인받으니 속이 뒤틀렸다. "자리라니요.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물건이 아니면 뭐냐. 지금 왕세자비 자리에서 떨어진 딸이 뭘 할 수 있는데."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할 말이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이 남자한테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걸 알았으니까. "나가 봐라. 정해지면 알려주마." 정해지면 알려주마. 마치 택배 배송일 알려주는 소리였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서재를 나왔다. 서재를 나오자 하인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어제까지 내게 존대를 하던 시녀 하나가 오늘은 인사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복도 끝에서 청소하던 하녀 둘이 나를 보고 눈짓을 주고받았다. 뭘 저렇게 신났나 싶어서 가만히 서 있었더니, 그중 하나가 슬쩍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사이로 내 이름이 섞여 나왔다. 정확히 뭐라는지는 안 들렸지만 안 들려도 다 알 수 있었다. 발걸음을 늦추고 잠시 서 있었다. 웃음소리에 "파혼", "그 잘난 아가씨" 같은 단어들이 섞여 나왔다. 나는 헛웃음이 났다. 와.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어제까지는 공작가의 장녀였고 오늘은 그냥 짐짝이었다. 사람들은 참 빠르게 태도를 바꾼다. 마치 핸드폰 앱 업데이트처럼, 어제 버전이랑 오늘 버전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어제까지 나한테 굽신거리던 사람들이 오늘은 그냥 지나가는 손님 보듯 했다. 이게 원래 이 집의 본모습이었나, 아니면 내가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건가. 둘 중 뭐가 됐든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창밖을 보고 있는데 유모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나를 걱정해 준 사람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조심스러웠고, 들어오는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없는 사람처럼 지나칠 때, 이 사람만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아가씨, 밖에서 이상한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요." 유모는 말을 꺼내기 전에 문 쪽을 한 번 돌아봤다. 누가 듣는지 확인하는 습관, 이 집에서 오래 산 사람만이 갖는 버릇이었다. "공작님께서 변방 영주와 혼사 얘기를 알아보고 계신다고···" 변방 영주.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저절로 굳었다. 대운국에서 변방으로 시집간다는 건 사실상 유배와 다름없었다.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왕도에서 멀어지면 그 즉시 정치적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왕세자비 자리에서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이번엔 아예 이 나라에서 지워지는 셈이었다. "누굽니까, 그 영주가." "청류령의 선우강이라고···" 선우강. 이름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궁중에서 떠도는 소문 중에 이 이름이 안 나오는 자리가 없었다. 젊은 여자의 피와 살을 먹고 늙지 않는다는 소문, 사람을 사고파는 인신매매를 벌인다는 소문, 밤마다 짐승으로 변한다는 소문까지. 그 이름이 나오면 시녀들도 목소리를 낮췄다. 어릴 때 유모가 잠들기 전에 무서운 이야기 하나쯤 해주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이 이름이 나오는 이야기는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땐 그냥 지어낸 얘기라고 생각했는데. "유모, 아버님이 정말 저를 그런 자한테 보내려고 하신다는 겁니까." 유모는 대답 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 침묵이 어떤 대답보다 확실했다. "확실한 얘깁니까, 아니면 그냥 도는 소문입니까." "저도 정확히는···" "유모." "관리인들 사이에서 나온 얘기라고 들었습니다. 벌써 서신이 오갔다는 말도 있고요." 서신. 벌써 서신이 오갔다는 건 이미 얘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얼마나 빠르게 굴러가고 있는지 그제야 실감했다. 파혼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다음 시집 자리까지 정해지고 있다니. 이 집안 사람들 일 처리 속도는 정말 인정해 줘야 할 지경이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마당을 내려다봤다. 어제까지 내가 걷던 정원, 어제까지 내게 인사하던 하인들, 어제까지 내 것이라고 믿었던 이 집. 전부 하루 사이에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정원의 나무들도, 마당을 오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어제와 똑같았을 텐데, 오늘은 유난히 낯설었다. 서재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였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아서 그 대화가 어렴풋이 새어 나왔다. 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창문 밑에 서서 숨을 죽이고 들었다. 그 대화 속에 청류령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됐다. "청류령이면 확실합니까." "이미 답신이 왔습니다, 공작님. 청류령주 쪽에서도 나쁘지 않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좋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늦출 필요도 없지."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이건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 것을. 내 의사는 그 결정 안에 어떤 자리도 없다는 것을. 창문 아래에 서서 숨죽이고 있는 나 자신이, 이 순간만큼은 이 집안에서 가장 초라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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